본문: 마태복음 3:13-17
(13)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에 오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주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곧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개역개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월 둘째 주일은 교회력으로 ‘주님의 세례 주일(Baptism of the Lord Sunday)’입니다. 이는 전통적으로 주현절(Epiphany) 이후 첫째 주일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애를 시작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인간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 받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의미를 바탕으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사역의 시작,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세례를 통해 받은 새로운 신분과 사명을 되새기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구원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이 받는 세례를 받으신다는 것, 이것은 마치 태양이 땅으로 내려와 어둠 속에 거하는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입니다!
요단강변에서 벌어진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며 회개를 촉구하던 그곳에,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오셨습니다. 오, 이 얼마나 역설적인 광경입니까! 빛이 어둠을 찾아오고, 생명이 죽음의 그림자 아래로 내려오고, 거룩이 죄악 가운데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왜 죄인의 자리에 서셨는지, 그 놀라운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며,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왕이 종의 자리로 내려오시다 (13-14절)
갈릴리에서 요단으로 – 영광에서 겸비로의 여정 :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에 오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구절을 가볍게 지나치지 마십시오! “예수께서… 요단에 오사”라는 이 단순한 표현 속에 얼마나 깊은 신학이 담겨 있는지 아십니까?
먼저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자라신 곳이요,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입니다. 모세가 건너지 못하고 바라만 보았던 곳,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 기적적으로 건넌 곳, 나아만 장군이 자존심을 버리고 일곱 번 몸을 담가 문둥병에서 고침받은 곳입니다. 요단강은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곳에서 세례 요한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나온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천둥같이 외치던 선지자였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 너희는 죄인이다, 회개하라, 그리고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사두개인들도, 세리들도, 군인들도 왔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단강물은 죄를 씻는 상징이었고, 물속에 잠기는 것은 옛 삶에 대한 죽음을,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죄인들의 행렬 속에,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시는 분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요단'(יַרְדֵּן)은 ‘내려가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야라드'(יָרַד)에서 왔습니다. 얼마나 적절한 이름입니까!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하늘 보좌에서 이 땅으로, 영광에서 낮음으로, 거룩에서 죄인들 가운데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요단강으로의 여정은 바로 이 ‘케노시스'(κένωσις), 즉 ‘자기 비움’의 구체적 실현이었습니다!
요한의 거부 – 당연한 항변 :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주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주께서 내게로 오시나이까” (14절)
세례 요한의 이 반응이야말로 얼마나 자연스럽고 옳은 것입니까! 헬라어 원문을 보면 더욱 강렬합니다. “디에콜뤼엔”(διεκώλυεν)이라는 동사는 ‘강력히 막으려 하다’, ‘필사적으로 저지하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으로, 요한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예수님을 말리려 했음을 보여줍니다.
왜 요한은 이렇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 속에 있을 때부터 예수님의 존재를 인식했던 사람입니다 (눅 1:41-44).
그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마 3:11)고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단지 “주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소리에 불과함을 알았습니다 (요 1:23).
요한의 세례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 즉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이 단어는 ‘메타'(변화)와 ‘누스'(마음, 생각)의 합성어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 삶의 방향의 180도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개할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히브리서는 명확히 선언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5).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의 항변 속에는 신학적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내가 주께로부터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요한은 자신이 죄인임을, 그리고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습니다 – 죄인이 거룩한 분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라고 외쳤던 것처럼, 요한도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역설의 신비 – 의사가 병자에게로 :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핵심적인 역설을 봅니다. 예수님은 깨끗한 자가 더러운 자를 정결케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깨끗한 자가 더러운 자의 자리에 서서 그 더러움을 친히 짊어지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막 2:17).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수님이 단순히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에 서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속제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레위기는 말합니다. “그는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고 가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 4:4).
안수는 죄의 전가를 의미했습니다. 죄인의 죄가 희생제물에게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바로 이 원리의 성취였습니다! 이사야 53장이 예언한 대로,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바울은 더욱 직설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의 자리에 서신 것,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자들과 함께 서신 것, 거룩하신 분이 부정한 자들의 행렬에 합류하신 것! 마치 왕이 반역자들의 감옥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부자가 거지들의 거처에 스스로 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교환'(Great Exchange)입니다 – 그가 우리의 것을 취하시고, 우리는 그의 것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15절)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대한 순종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5절)
“모든 의를 이루는 것” – 헬라어로 “플레로사이 파산 디카이오쉬네”(πληρῶσαι πᾶσαν δικαιοσύνην)! 여기서 ‘플레로오’는 ‘가득 채우다’, ‘완성하다’, ‘성취하다’는 뜻입니다.
마태는 이 동사를 자주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마 1:22, 2:15, 2:17, 2:23, 4:14 등).
그리고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단순히 도덕적 올바름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구약의 ‘체데크'(צֶדֶק)와 연결되는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상태, 언약적 의무의 완전한 이행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합당합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새 아담으로서 첫 아담이 실패한 순종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로마서 5장은 이렇게 대조합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을 통해 그 저주를 역전시키러 오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심은 그 순종의 첫걸음이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실패한 사명을 완수하러 오셨습니다.
출애굽기를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습니다. 물을 통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세례’였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고” (고전 10:1-2).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불순종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참 이스라엘로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의 구조를 보면, 예수님은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러 오신 분으로 묘사됩니다.
애굽에서의 탈출 (마 2:15, “내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물을 통과함 (세례), 광야에서의 시험 (마 4:1-11) – 이 모든 것이 출애굽의 패턴을 따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실패한 곳에서, 예수님은 성공하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성취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율법은 거룩함을 요구했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그러나 아무도 이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하셨습니다. 그는 “율법 아래에 나신 이”(갈 4:4)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죄인과의 연대 – 대표로서의 사명 :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 이 작은 단어 “우리”(ἡμᾶς)를 주목하십시오!
예수님은 “내가”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과 함께 일하신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 예수님은 자신을 인류와 동일시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 2:17).
“같이 되심”(ὁμοιωθῆναι) – 이것은 단순한 외적 유사성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연대, 완전한 동일시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레 16:6, 11). 왜냐하면 그도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백성의 연약함을 능히 동정하는 것은 자기도 연약함에 싸여 있음이라” (히 5:2).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죄인들과 완전히 동일시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대리적 회개'(vicarious repentance)의 개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신 것이 아닙니다 – 그에게는 회개할 죄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는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다니엘 선지자의 기도를 기억하십니까? 다니엘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백성을 대표하여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범죄하여 악을 행하며… 주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였으므로” (단 9:5, 8, 11, 15).
다니엘은 “그들이”가 아니라 “우리가”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메시아 직무의 시작 – 선지자, 제사장, 왕 : 예수님의 세례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공식적인 시작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선지자, 제사장, 왕은 모두 기름부음을 받아 직무를 시작했습니다 (삼상 10:1, 16:13; 출 29:7; 왕상 1:39).
세례는 예수님에게 이러한 ‘취임식’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선지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신명기는 예언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신 18:15).
예수님은 이 약속의 성취이십니다 (행 3:22-23).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드리러 오셨습니다.
시편 110편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히브리서는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 (히 5:6, 6:20, 7:17, 21).
왕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러 오셨습니다.
다윗 언약은 약속합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말했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2-33).
예수님의 세례는 이 삼중 직무를 시작하는 공식적인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의를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와 확증 (16-17절)
열린 하늘 – 회복된 교제 :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곧 열리고” (16절 상)
“하늘이 열렸다”(ἠνεῴχθησαν οἱ οὐρανοί) – 이 표현은 헬라어 수동태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여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각적 현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하늘과 땅 사이에는 장벽이 생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 3:23-24). 천사들과 불 칼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이사야는 부르짖었습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사 64:1). 선지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애통해하며,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개입하시기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의 세례와 함께,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제가 회복되기 시작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요 1:51). 이것은 야곱이 벧엘에서 본 환상 (창 28:12)을 상기시킵니다 – 그러나 이제 사다리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가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히 10:19-20).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을 때 (마 27:51), 그것은 요단강에서 열린 하늘의 완전한 성취였습니다!
비둘기같이 임하신 성령 – 기름부음과 능력 :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6절 하)
성령이 “비둘기같이”(ὡς περιστερὰν) 임하셨습니다. 왜 비둘기입니까? 이것은 깊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비둘기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킵니다 (창 8:8-12).
홍수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비둘기는 평화와 새로운 시작을 상징했습니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잎을 물고 돌아왔을 때, 노아는 하나님의 진노가 그쳤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예수님 위에 임한 성령 비둘기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둘째, 비둘기는 순결과 온유함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마 10:16).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며, 그가 임한 예수님은 순결하고 온유한 메시아이십니다.
셋째, 비둘기는 가난한 자의 제물이었습니다 (레 12:8).
마리아가 정결예식을 위해 드린 것도 “비둘기 두 마리”였습니다 (눅 2:24).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 낮은 자와 동일시하셨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성령이 “임하셨다”(καταβαῖνον… ἐρχόμενον)는 사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왕들에게도 성령이 임했습니다 (민 11:25-26; 삿 3:10, 6:34; 삼상 10:6, 16:13).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이고 부분적이었습니다. 사울에게서 성령이 떠났습니다 (삼상 16:14). 그러나 예수님 위에 임한 성령은 영구적이고 완전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아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 11:2).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 구절을 읽으신 후 선포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
사도 베드로는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행 10:38).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모든 사역의 원천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음성 – “내 사랑하는 아들“ :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7절)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 시내산에서 (출 19:19, 20:1), 그리고 몇몇 특별한 순간들에서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늘이 열리고, 아버지께서 친히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οὗτός ἐστιν ὁ υἱός μου ὁ ἀγαπητός) – 이 선언은 세 가지 구약 본문의 메아리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 시편 2편 7절: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것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하나님은 메시아를 “내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이심이 선포됩니다!
둘째, 창세기 22장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그를 거기서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드리실 것을 예표합니다. “사랑하는”(ἀγαπητός)이라는 형용사는 ‘독생의’, ‘유일한’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셋째, 이사야 42장 1절: “내가 붙드는 내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이것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첫 번째 노래입니다. “내 기뻐하는 자”(ἐν ᾧ εὐδόκησα)는 바로 이 구절의 인용입니다!
이 세 본문을 종합하면, 아버지의 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분은 내 아들, 메시아이시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독생자이지만, 내가 희생제물로 드릴 자이다. 그는 고난받는 종으로서 세상의 죄를 짊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를 기뻐한다!“
“내 기뻐하는 자라” – 이것은 놀라운 선포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기뻐하십니다. 왜입니까? 아들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요 10:17).
이 장면에서 우리는 삼위일체를 봅니다 – 아들이 물에서 나오시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고, 아버지께서 하늘에서 말씀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모두 우리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놀라운 본문을 묵상했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우리와 자신을 동일시하셨고,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순종의 길을 시작하셨으며, 그 결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고 아버지께서 그를 인정하셨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첫째,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기초합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대신 순종하셨고, 우리 대신 고난받으셨고,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9)!
둘째, 우리도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자리에 서셨듯이, 우리도 낮고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야 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낮추시고” (빌 2:5-8). 우리는 자신을 높이려 하지 말고, 오히려 낮추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 6:4). 세례는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옛 사람을 죽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살아야 합니다!
넷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후에야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다섯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신해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요 1:12).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 3:1).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죄인과 함께 서셨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서 멀리 바라보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려오셨습니다. 우리의 자리에, 우리의 수준에, 우리의 고통 속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그곳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을 따라갑시다.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이웃을 섬기며,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사는 삶을 살아갑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 이 음성이 우리 심령 깊이 울려 퍼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