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가난한 자의 복 / 민건동 목사

본문 : 마태복음 5:1-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개역개정)

 

우리는 지금 어떤 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세상은 성공한 자가 복된 자라고 말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복된 자라고 말합니다. 남보다 높은 곳에 오른 자가 복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 마디에서 전혀 다른 복을 선포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어떤 복인가?

이것은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채우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비우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는데 예수님은 낮아지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 역설적인 복의 의미를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의미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12절까지의 팔복은 마태복음 전체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섯 개의 큰 설교 단락으로 구성했는데, 산상수훈은 그 첫 번째입니다. 이는 모세오경의 다섯 책과 대응되며,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 제시하려는 마태의 편집 의도를 보여줍니다.

1절에서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셨다는 표현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율법을 받았던 것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전달한 중재자였던 반면, 예수님은 스스로 앉으셔서 가르치시는 권위자이십니다. 마태는 이를 통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무리를 보시고 제자들이 나아왔다는 표현에서 마태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제자들을 향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무리를 향한 것입니다. 제자도의 길이 특정한 소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 나라의 초대임을 보여줍니다.

팔복의 전승은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23절에도 나타나지만 형태가 다릅니다. 누가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를 기록했는데, 마태는 여덟 가지 복으로 확장했습니다. 이는 마태와 누가가 공통의 자료인 Q자료를 사용했지만 각자의 신학적 목적에 따라 편집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의 첫 번째 복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기록합니다. 학자들은 이 차이에 대해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물질적 가난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마태가 이를 영적으로 재해석했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의 원래 의도가 영적 가난이었고 누가가 이를 사회적 맥락에서 강조했다고 봅니다.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로마의 지배 아래 대다수 유대인은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종교적으로 억압받았습니다. 헤롯 왕가와 대제사장 가문, 그리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정치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소외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팔복 선언은 혁명적이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자가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은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기에 율법의 모든 규정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종교적 위계를 전복시키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자가 복되다고 선포하십니다.

 

헥심 원어 분석

“심령이 가난한 자”에서 가난하다는 말은 헬라어 프토코스(πτωχός)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가난을 나타내는 두 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페네스(πένης)와 프토코스입니다.

페네스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일 일해야 하는 가난한 노동자를 의미합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자신의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프토코스는 완전히 궁핍하여 구걸해야만 하는 거지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고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직 타인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는 프토코스입니다. 이는 단순한 가난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력과 의존성을 나타냅니다.

여기에 “심령으로”라는 표현이 더해집니다. 헬라어 원문은 토이 프뉴마티(τῷ πνεύματι)입니다. 이는 여격으로 사용되어 가난함의 영역이나 측면을 나타냅니다.

프뉴마는 영, 영혼, 정신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은 영적으로 완전히 궁핍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영적 상태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구약의 배경도 중요합니다. 히브리어 아나브(עָנָב)와 아니(עָנִי)는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의미합니다. 칠십인역에서 이 단어들이 프토코스로 번역되었습니다.

시편 34편 6절은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곤고한 자가 바로 아니입니다.

시편 40편 17절은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이사야 61장 1절은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선포합니다.

구약의 아나윔 전통에서 가난한 자들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실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과 부를 추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아나윔 전통을 계승하시면서 동시에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십니다. 단순히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영적으로 자신의 빈곤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고 선포하십니다.

 

심령의 가난이 주는 의미

인간의 근본적 한계 인식 :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근본적 한계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이사야 64장 6절은 말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로마서 3장 23절은 선포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이 이를 명확히 밝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선행이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의를 자랑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고 십일조를 드렸으며 금식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격 없음을 아는 자에게 은혜로 주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 의존 :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합니다. 거지가 구걸할 때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베푸는 자의 자비에 의존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거지인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감사함으로 받을 뿐입니다.

시편 123편 2절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종의 눈이 그의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의 여주인의 손을 바라봄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이 전적인 의존은 수동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능동적인 믿음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모든 시도를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신뢰하며 기다립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이 부모를 먹여 살릴 수 없음을 압니다.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8장 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복의 문 : 심령의 가난은 다른 모든 복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자신의 영적 빈곤을 깨닫지 못하면 애통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할 수 있습니다.

배부른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를 수 없습니다. 자신이 부족함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자신이 자비가 필요한 자임을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자임을 깨닫는 자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청결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더럽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하나님께 깨끗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화평을 만드는 것도 자신이 먼저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자만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만이 다른 사람과도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의를 위해 박해받는 것도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확신하는 자는 교만하여 박해를 견딜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심령의 가난은 모든 복의 토대이며 시작입니다.

 

현대적 적용과 실천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도전 : 현대 사회는 물질적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여깁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더 큰 집, 더 비싼 차, 더 많은 돈을 가진 자가 복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정반대입니다.

풍요로운 자가 아니라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은 자가 아니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영생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문제는 재물 자체가 아닙니다. 재물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재물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많은 것을 추구하도록 부추겨집니다. 광고는 우리에게 이것을 사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속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전도서 5장 10절은 말합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물질로 채워질 수 없는 영적 갈증이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향합니다.

자기중심적 문화에 대한 대안 : 현대 문화는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입니다. 나의 행복, 나의 성공, 나의 권리만을 추구합니다.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라고 강요받습니다.

소셜미디어는 이러한 경향을 극대화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려 합니다. 완벽한 외모, 완벽한 삶, 완벽한 행복을 연출합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깊은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의 약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완벽한 척하지 않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입니다. 진정한 용기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주님께 그것을 제거해 달라고 간구했지만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가 약함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나타납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힘 : 심령이 가난한 자의 태도는 건강한 공동체를 세우는 토대가 됩니다.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각자가 옳다고 주장하며 갈등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합니다. 서로의 약점을 채워주고 지지합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서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점과 실패를 솔직하게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현대 교회는 종종 완벽함을 강요합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어려움이나 죄와의 싸움을 솔직하게 나누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판단할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는 우리가 가면을 벗을 수 있는 곳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곳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권면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우리는 서로의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부족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도움이 필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함으로 풍성해지는 역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노력과 공로를 내세우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는가? 아니면 완벽한 모습만을 보여주려 하는가?

시편 139편 23절에서 24절의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교만과 자기의를 드러내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매일 자신을 비우는 훈련을 하라 : 심령의 가난은 한 번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신을 비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주님께 의탁합니다“

일이 잘 풀릴 때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일이 잘 안 풀릴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하는 기회임을 깨달으십시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에서 8절에서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우리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으로 살라 :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은 높은 자가 복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낮은 자가 복된 자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자가 복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된 자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복된 자라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약한 자가 복된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8절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높으신 분이 낮아지셨습니다. 우리도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첫 번째 복은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합니다.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입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입니다.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 속에 진정한 복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울 때 하나님께서 채우십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나타납니다.

성도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습니다.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이 복을 붙잡으십시오. 날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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