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목회 신학] 신학 – 유재무 목사(예장뉴스)

[편집자 주 ] <마을목회 신학과 실천 / 오필승 엮음>은 ‘마을목회’와 ‘마을목회신학’의 출발점이 된 뜻 깊은 책인데 시중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유로 내용을 이곳에 연재합니다. 혹시 내용 중에 교정할 부분이나 공개 공유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면 발행인(오필승 목사)께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을목회 패러다임의 전환

/ 유재무 목사 (예장뉴스)

 

마을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삶의 자리나 지역을 의미한다. 우리말로는 동네라고도 하는데 그간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이 마을의 개념이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러나 지방정부들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 살리기“”마을 만들기“라는 의미로 새롭게 부각하고 있다.

 

이에 몇 년 전부터 우리교단에서도 “마을목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을이란 의미가 전통적으로 어느 교회가 그 교회 안의 교인들을 향한 목양적인 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하는 “마을”이라는 의미는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을목회라는 “목회”라는 말에 어떤 수식어를 붙여서 그 목회의 내용과 목표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교육목회, 목민목회, 도시목회, 농촌목회, 민중목회라는 말이다. 이는 어떤 목회의 강조점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마을목회“라는 용어와 패러다임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목회방향과 목적을 마을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은 특정 시대와 분야를 견인하는 규범 및 사물을 보는 방식을 나타내며, 과학·사상·산업 등 다양한 분야에 쓰이는 말이다.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 정의되는 이 용어는 토마스 쿤(Thomas S. Kuhn)이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1962)>에서 쓰여 졌다, 따라서 오늘날 이 패러다임의 의미는 새로운 것, 나은 것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고전적 목회 패러다임

 

한국교회는 선교초기부터 전통적으로 영혼구원에 역점을 두고 이 세상은 악한 것이고 저 세상(피안)에 대한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세계에 대한 초월성으로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식의 논리로 단순화시켜 전도를 해왔다. 최근 까지도 사영리라는 전도지를 보면 대다수의 교회는 여전히 개인구원에 머물고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무지했고 단순한 대중들에게 도를 전하기 위하여 복음을 단순화하고 또 우리민족의 오랜 전통인 길흉화복을 접목시킨 것이다. 이는 모든 종교에서 보여 지는 기복신앙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불가피하게 지울 수 밖에 없는 일을 죄악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죄를 고백하면 죄 사함을 받는 다는 도식의 종교관을 가르쳐 왔다.

가난한 현실과 알 수 없는 미래로 불안해하는 인간들에게 상상으로나마 큰 의지와 힘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이런 종교의 힘이다. 내가 잘되고 자식이 잘된다고 하는 데 누가 부정을 하고 싫어하겠는가? 어떤 종교든지 그것이 제시하는 구원(유토피아)과 구도자의 길로 청빈과 물질생활 그 종교의 지도자들, 그 대상을 신격화하게 되는 이유다.

 

신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을 그 신의 대리자로 인식하거나 그렇게 인식하도록 가르친 것이 한국교회다. 그래서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순종을 덕목으로 삼고 그 가르침을 신격화하여 왔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앞에서의 목회, 하나님이 다 하신다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맡기는 식이다. 사실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한국교회는 성장한 것이다. 개인의 신앙도 외형도 모두 그런 성공주의 신앙과 근면한 생활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런 종교적인 가치와 그것이 주는 집단성과 체면성이 힘든 세상에 대한 위로와 평안을 주는듯한 것을 느끼게 하는 목회관이 오랜 동안 통용되어 왔고 지금도 유효하다. 사실 교회나 종교에서 이런 기능을 뺀다면 신앙생활은 무미건조할 것이다.

 

그런 바탕에서 한국교회는 성장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경건과 청빈 근면도 부를 축척하는 요인이 됐다. 물론 다른 요인으로 인구증가와 산업화와 도시화라는 축도 한몫을 했다. 경제개발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고 신흥도시의 출현과 개인소득의 증대는 교육의 상승과 함께 일자리를 위한 이농과 주거지의 팽창은 자연스럽게 지역교회의 증가를 가져왔다. 따라서 모든 교회들이 성장하고 부흥한 것이 아니라 특정지역과 자리가 중요한 요인인 것이다.

 

세계사적으로는 과거 1000년의 기간에 이룩한 문명의 발전이 우리는 100년으로 압축된 것이라는 비유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되니 우리의 정신과 신앙관 등은 서구화되고 잘못된 축복관과 경제관으로 천박한 자본주의에 물들게 된 것이다. 오직 성공과 축복, 물질의 축척을 위하여 비윤리적인 것도 서슴지 않게 된 것도 한 요인이다. 성경에서 물질이 악은 아니지만 물질만 숭상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춥고 가난한 시절의 습성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도 정신적 여유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목회자들도 성장과 대형의 결과물을 개인화 하였다. 이런 현상에는 목회자의 절대적인 영향력이 바탕이 되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한국교회의 문제다. 정신과 물질이 함께 성숙해야 하는데 경제적으로는 부유해지고 정신적으로는 더 피폐해지거나 낙후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도 호황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목사라는 직업은 여성들의 결혼상대로도 인기가 급상승했다. 낳아진 여건속의 목회자를 보고 자란 세대들과 교회의 중직자들도 자녀들이 성직자가 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다. 이런 아노미 현상 속에서 무엇이 목회인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소위 작은 교회 혹은 민중교회라고 부르는 이들이다. 사회적으로도 마침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책자를 통하여 대형화에 대한 도전장을 내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옛것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소리와 문화로 노래하고 건축에서도 옛것을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정신이 지배하는 교회

 

사회적으로 부가 증대되면서 한국교회도 상업자본주의의 원리인 ‘돈’(맘몬)이 지배하게 된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을 정도로 깊이 지배하게 된다. 그리고 이 논리에 매몰되어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한국개신교회의 현주소이다. 한국교회는 거기에 따라 교회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기계적으로 실천되고 있다.

 

바로 ‘교회성장론’이라는 바빌론포로에 사로잡혀, 미국식 자본주의의 철저한 경영논리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은 이것을 근본주의적이며, 전통주의라고 말한다. 또한 일부에서는 경건주의라고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을 옹호하는 번영신학까지도 출현을 했다.

 

이런 식의 목회자는 한마디로 철저하게 경영자(CEO)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CEO였다” 라는 책도 나왔다. 문제는 이것의 기저는 기업의 생리인 효율과 성과에 최대목표를 두고 있으며, 미국식 자본주의의 본질과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TV 방송매체(유튜브 및 인터넷 방송매체 포함)들은 부자교회와 부자목사들을 찾아다니며, 설교방송의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그 빈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으며, 설교방송의 횟수가 목회자의 능력과 자질을 평가하게 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의 문제는 여기에 더 커지고 싶어 하는 중소교회의 목회자들도 가담하기 시작했다.

 

이들 목회자들은 상업방송설교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명함과 이력서에 어느 방송 설교자라고 자랑질을 한다. 방송설교도 하나의 감투가 되어 버린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러니 방송국은 호황을 누린다. CBS, CTS, C 채널에 온누리와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자체 방송국을 운영하는 이유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체한 것

 

이러한 상업자본주의에 길들여진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정보 매체를 통해 자신을 알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은, 목회자들의 의식 속에도 상업자본주의의 원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교인들의 신앙과 심령의 각성을 목적으로 했던 부흥회는, 교인들의 양적 확대와 하나의 교회성장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이마저도 지역주민들의 봉사에 대한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면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80-90년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부흥사 단체들은 대부분 유명무실해졌다. 대형집회도 사라졌다.

 

한국개신교는 상업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선교초기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백성을 위한 선교에서 크게 이탈된 것은 분명하다. 한국교회가 이들과 함께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님이 벌이신 하나님나라운동을 망각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의식화된 교인들과 가난한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다. 갈수록 ‘가나안교인’은 늘어나고 있다.

 

상업자본주의 원리가 철저하게 적용되고 있는 오늘, 돈만 있으면 모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다. 권력도 사고, 성직도 사고, 총회장도 사고, 연합회장에도 올라갈 수 있다. 돈이 있어야 나라도, 기업도, 교회도 운영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가난한 사람도 돕고, 선교도 할 수 있고, 교회도 건축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본주의 시대에 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돈의 속성을 잘 아셨고 이에 대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서 돈만큼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없다. 우리 속담에도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 윤리는 바로 기독교정신이고 기독교정신은 곧 사업과 인생, 목회와 신앙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있다.

 

맘몬에 길들여진 교회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제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복음 6장24절)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이 양립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사제들에게서 돈이 어떤 위력을 가졌는가를 보았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비웃었다. 이 말에 당황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먹고 마실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자 자기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서 채무를 삭감해 준다. 그리고 그들을 친구로 삼는다. 불확실해진 미래를 준비한다. 여기에서 교훈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그렇다. 오늘 한국교회가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맘몬을 버리고, 우리가 사는 마을의 이웃들에게로 다가가서 그들과 같이 다가오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나라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의 교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과거 우리네 삶의 터전이었으며 모든 것을 품어 주었던 마을에 대한 이해가 새롭다. 이미 30여 년 전부터 이런 방향을 고민하고 마을목회의 단초를 연분들도 있다.

 

왜 마을 목회인가?

 

예전에는 마을의 교회에 교인은 적었지만 사는 사람들은 그나마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을이 비어간다. 고령화와 저 출산과 도로의 발달로 도 농간의 거리와 공간이 없어지게 되자 사람들은 도시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을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바로 이 마을에서는 협동과 축제, 재판과 놀이가 이뤄진 곳이다.

 

바로 그 마을에서 이제 목회자들은 더 이상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의 희망과 꿈을 같이 꾸며 현장으로 찾아가는 목회를 말한다. 이장 목사, 일하는 목사, 농사짓는 목사들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우리는 마을을 떠났고 무시했고 백안시 했던 종교적 우월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거기 남아 있는 이들과 형제와 자매로 다시 인연을 맺어 가는 것이다.

 

도시에서도 이 마을의 정신은 구현될 수 있다. 문을 닫고 얼굴을 가린 숨어버린 인간에서 자기의 이름과 사는 곳을 알려주는 마을의 주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이제 목회자는 더 이상 마을의 리더에서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 목회자들은 더 나은 교회, 큰 교회, 도시로, 기회가 되면 빠져나갔다.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다. 이것은 마을을 의식하지 않는 증거다. 교회가 이렇게 세속적인 것과 결탁하면서 더욱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가 부자가 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기 시작했다. 처음의 한국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역이었다. 선교사들도 가난에 대하여 측은히 생각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었다.

 

공동체적인 교회로 전환해야

 

구약시대, 신약시대에는 철저하게 공동체적인 신앙이 그대로 배어 있다. 구약성서는 개인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중해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교인들은 개인들로서 부름 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즉 공동체로서 부름을 받았다.

 

한편 한국교회는 교회 안팎에서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운동을 위한 선교하는 교회로 마을의 교회로 전환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교회형태에서 벗어나 평신도 중심의 마을 공동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제 목회의 패러다임은 전환되어야 한다. 더 이상 성직자 중심, 교회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 세상, 마을을 우리 목회와 선교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 일찍이 호켄다이크라는 선교학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말하기를 이전에는 교회나 사람이 선교했지만 이제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미 거기서 역사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야 그것을 발견하고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린 것이다. 이제 마을목회는 바로 그것을 인식했고 과거의 목회에서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농촌과 농민은 동정과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받아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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