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개역개정)
로마서 14장은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현실적인 갈등을 다룹니다. 음식 규정과 특정 날짜를 지키는 문제를 두고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 깊은 골이 생겼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확신했고, 어떤 이들은 채소만 먹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모든 날을 동일하게 여겼고, 어떤 이들은 특정 날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갈등의 한복판에서 14장 17절을 통해 본질을 향한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문제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화와 기쁨에 있습니다.
이 선언은 오늘날 비본질적인 문제로 분열하고 있는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1. 성경 본문에 나타난 인간의 문제나 갈등 (성경 속의 율법)
로마 교회의 시대적·역사적 배경
로마서가 기록된 시기는 대략 주후 57년경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공존하는 복잡한 공동체였습니다. 주후 49년 글라우디오 황제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가,
54년 네로 황제 시기에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되면서 교회 구성이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떠난 동안 이방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던 교회에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오면서 신학적·문화적 긴장이 발생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의 음식 규정과 절기 준수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레위기 11장의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안식일과 절기 준수는 그들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반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율법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구원과 정체성에 관한 근본적인 신학적 이해의 차이였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비판과 정죄
바울은 14장 3절에서 문제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헬라어 ‘엑수데네오'(ἐξουθενέω)는 ‘업신여기다’, ‘무시하다’, ‘경멸하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음식 규정을 지키는 이들을 율법주의자로, 미성숙한 신자로 경멸했습니다. 반면 ‘크리노'(κρίνω)는 ‘판단하다’, ‘정죄하다’는 의미로, 믿음이 약한 이들은 자유롭게 먹는 이들을 방종한 자로, 거룩함을 버린 자로 정죄했습니다.
이러한 상호 비판은 공동체를 파괴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합니다.
‘프로스콤마'(πρόσκομμα)는 ‘걸림돌’, ‘장애물’을 의미하고,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은 ‘덫’, ‘올가미’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신념을 고수하느라 형제에게 영적 올가미를 놓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죄
15절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여기서 ‘아폴뤼미'(ἀπόλλυμι)는 ‘멸망시키다’, ‘파괴하다’는 강력한 동사입니다. 단순히 기분을 상하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영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20절은 더 나아갑니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일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헬라어 ‘카탈뤼오'(καταλύω)는 ‘완전히 파괴하다’, ‘허물다’는 뜻으로, 건물을 해체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들여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먹고 마시는 사소한 문제로 무너뜨리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2. 오늘날 우리 삶 속에 나타난 유사한 문제와 죄 (세상 속의 율법)
현대 교회의 비본질적 갈등들
오늘날 우리 교회는 로마 교회와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는 아닐지 몰라도, 비본질적인 것들로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예배 형식을 두고 전통 예배와 현대 예배 지지자들이 대립합니다. 찬양 방식을 두고 찬송가와 복음성가, CCM을 놓고 논쟁합니다. 정치적 성향과 사회적 이슈에 대한 입장 차이가 교회를 갈라놓습니다.
어떤 이들은 특정 번역 성경만을 고집하며 다른 번역을 사용하는 이들을 의심합니다. 어떤 이들은 특정 신학 전통을 절대화하며 다른 전통을 이단시합니다. 복장 규정, 교회 프로그램 운영 방식, 선교 전략의 차이까지도 분열의 원인이 됩니다.
우리는 각자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을 절대화하며, 다르게 생각하는 형제자매를 업신여기거나 정죄합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종교성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외적 형식들을 하나님 나라의 본질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환경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승진했을 때, 재산이 늘었을 때, 건강을 회복했을 때 “여기가 천국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좋은 예배당, 훌륭한 프로그램, 많은 숫자, 재정적 안정을 하나님 나라의 임재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환경이 바뀌면 행복도 사라집니다. 외적 조건에 의존하는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측정할 수 있는 것, 자랑할 수 있는 것에 집착하며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놓칩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이기심
로마 교회의 갈등 이면에는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신념, 자신의 자유, 자신의 양심만을 주장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형제의 유익보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보다 나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더 열심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육체의 일을 나열합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여기서 ‘에리테이아'(ἐριθεία)는 ‘이기적 야망’, ‘당파심’을 의미하고, ‘디코스타시아'(διχοστασία)는 ‘분열’, ‘분파’를 의미합니다. 이기심은 공동체를 파괴하며,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립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우리의 신념으로, 우리의 자유로, 우리의 확신으로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들여 세우신 교회를 비본질적인 논쟁으로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3.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성경 속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본질 선언
이러한 갈등의 한복판에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이 선언은 로마 교회에 대한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대한 신학적 정의입니다.
헬라어 ‘바실레이아 투 데우'(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순한 영역이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실현되는 현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가 ‘브로시스'(βρῶσις, 먹는 것)와 ‘포시스'(πόσις, 마시는 것)에 있지 않다고 단언합니다. 외적이고 의식적인 규정들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세 가지 핵심 덕목을 제시합니다.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의), ‘에이레네'(εἰρήνη, 평화), ‘카라'(χαρά, 기쁨).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엔 프뉴마티 하기오'(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 곧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이 세 가지 덕목의 원천이자 능력입니다.
성령 안의 의: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
‘의’는 단순히 법적 칭의를 넘어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올바른 관계와 행동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전체에서 ‘의’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1장 17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계시되었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전가됩니다.
그러나 칭의는 출발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은 자들은 이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6장 13절은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성령 안의 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되어, 형제와의 올바른 관계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14장의 맥락에서 의는 차별 없이 서로를 용납하는 것입니다. 3절 하반부는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어찌 거부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신뢰하고, 형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 안의 의입니다.
성령 안의 평화: 화목케 하시는 하나님
‘평화’는 개인의 심리적 평안을 넘어 공동체의 화목과 일치를 의미합니다. 헬라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שָׁלוֹם)에 상응하는 단어로, 단순한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온전함, 번영, 조화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입니다.
바울은 5장 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16절은 이를 확장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사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시고 화평을 이루셨느니라.“
하나님과의 화평은 형제와의 화평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14장 19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고 권면합니다. ‘타 테스 에이레네스'(τὰ τῆς εἰρήνης)는 ‘평화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며, ‘오이코도메'(οἰκοδομή)는 ‘건축’, ‘세움’을 의미합니다. 공동체를 건축하고 세우는 것이 성령 안의 평화입니다.
성령 안의 기쁨: 환난 중의 소망
‘기쁨’은 단순한 쾌락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기쁨입니다. 헬라어 ‘카라’는 외적 환경과 무관하게 내면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빌립보 감옥에서 기록된 편지입니다. 환경이 기쁨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5장 3-5절은 기쁨의 원천을 밝힙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으시고, 이 사랑이 환난 중에도 기쁨을 가능하게 합니다.
14장의 맥락에서 기쁨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형제가 세워지는 것을 볼 때 누리는 공동체적 기쁨입니다. 15장 13절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소망이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삶
18절은 이 세 가지 덕목의 결과를 제시합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헬라어 ‘둘류오'(δουλεύω)는 ‘종으로 섬기다’를 의미합니다.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섬기는 구체적 방식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유아레스토스'(εὐάρεστος), 곧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외적 규례의 준수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나타나는 삶입니다. 동시에 사람에게도 ‘도키모스'(δόκιμος), 곧 ‘칭찬받는’, ‘인정받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인정받는 삶,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4.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세상 속의 복음)
성령께서 세우시는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성령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선언합니다. 헬라어 ‘뒤나미스'(δύναμις)는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이기심, 교만, 분열을 깨뜨리고 의와 평화와 기쁨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비본질적인 것들로 분열된 교회를 성령으로 치유하고 계십니다. 서로 다른 배경, 다른 신학 전통, 다른 예배 형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기적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현재적 경험과 미래적 소망의 조화
하나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상속받을 유업으로 제시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경고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21절도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반복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은 더 명확합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이러한 구절들은 하나님 나라를 미래의 종말론적 실체로 규정합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고, 그때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14장 10-12절은 이를 상기시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현재 성령 안에서 경험되는 실재이기도 합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현재 시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의 의와 평화와 기쁨은 장차 상속받을 나라의 조건이자, 현재 성령 안에서 누리는 나라의 열매입니다.
이 둘은 모순이 아니라 긴장입니다. 우리는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로서, 오늘 성령 안에서 그 나라의 가치인 의와 평화와 기쁨을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윤리를 낳고, 현재의 경험이 미래의 확신을 강화합니다.
육체를 이기는 성령의 능력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안의 육체를 이기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육체와 성령의 대결 구도를 제시합니다. 16-17절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19-21절은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나열합니다.
특히 ‘에크트라'(ἔχθρα, 원수 맺음), ‘에리스'(ἔρις, 분쟁), ‘제로스'(ζῆλος, 시기), ‘디코스타시아'(분열함)는 로마서 14장의 상황과 직접 연결됩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는 공동체를 세웁니다. 22-23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카라'(희락)와 ‘에이레네'(화평)는 로마서 14장 17절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힐 때, 하나님 나라가 현실이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신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이를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5.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교회
비본질적인 것에서 자유로워지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외적 규례나 형식, 전통이나 관습은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절대화하며 형제를 정죄하거나 업신여기는 죄를 범해왔습니다.
로마서 14장 5-6절은 자유를 선언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들로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배 형식, 찬양 방식, 신학 전통의 차이는 다양성이지 분열의 원인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마음으로 확정하되, 다른 형제를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이 받으신 자를 우리가 거부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의와 평화와 기쁨을 실천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의 의와 평화와 기쁨에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의를 실천하십시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하여 형제와의 올바른 관계로 나아가십시오. 차별하지 말고, 편견을 버리고, 공정하게 대하십시오. 약한 자를 배려하고,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5장 1절은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평화를 만드십시오.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십시오. 나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15장 5-7절은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고 명령합니다.
가쁨을 누리십시오. 환난 중에도, 갈등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초자연적 기쁨을 경험하십시오. 이 기쁨은 형제가 세워지고, 공동체가 회복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때 더욱 충만해집니다.
15장 13절의 축복을 붙드십시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미래의 심판을 기억하며 현재를 살아가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무엇을 먹었느냐, 어떤 형식을 따랐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대했느냐, 공동체를 세웠느냐 무너뜨렸느냐가 물어질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경고합니다. 이 종말론적 긴장이 우리로 하여금 경솔하게 형제를 비판하는 것을 멈추게 하고, 덕을 세우는 일에 힘쓰게 합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기 원한다면, 현재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실천하십시오. 미래의 소망이 현재의 순종을 낳고, 현재의 순종이 미래의 확신을 강화합니다. 우리는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인내 가운데 연단되고, 연단을 통해 소망을 견고히 합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로 살아가십시오
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구체적 방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종은 자기 뜻대로 살지 않고 주인의 뜻을 따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서로 받으라고, 서로 용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 이것이 세상이 그리스도의 제자를 알아보는 표지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비본질적인 논쟁을 멈추고, 성령의 능력으로 본질을 회복하십시오.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로마서 15장 2절은 우리의 목표를 제시합니다.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현재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미래 하나님 나라를 확신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비본질적인 것들로 서로를 비판하고 정죄하며, 공동체를 파괴했는지 고백합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교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의와 평화와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하여 주옵소서.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형제를 사랑하며, 공동체를 세우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섬기는 종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오늘 이 자리에서 그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설교는 토론토 대학교의 설교학 교수인 폴 스콧 윌슨(Paul Scott Wilson)의 설교 방법인 ‘4페이지 설교(The Four Pages of the Sermon)’방식으로 네 개의 ‘페이지’로 나누어 구성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