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목회 신학] 신학 – 황홍렬 교수(부산장신대)

[편집자 주 ] <마을목회 신학과 실천 / 오필승 엮음>은 ‘마을목회’와 ‘마을목회신학’의 출발점이 된 뜻 깊은 책인데 시중에서 만나기 어려운 이유로 내용을 이곳에 연재합니다. 혹시 내용 중에 교정할 부분이나 공개 공유가 되지 않기를 바라시면 발행인(오필승 목사)께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원글의 ‘각주’는 기사 편집 상 부득불 생략하였습니다.)

마을만들기, 마을목회와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

/ 황홍렬 목사 (부산장신대 교수, 선교학)

I. 들어가는 말

일부 지자체에서 시작된 마을만들기가 사회의 주목을 받으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중앙정부도 관심을 보이면서 마을만들기가 이 시대의 대세가 되어 가고 있다. 홍성의 풀무원공동체나 우리나라 협동조합의 성지로 불리는 원주는 마을공동체로서의 역사가 반세기가 넘지만 대부분의 마을만들기는 역사가 짧은 편이다.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가 고도의 압축 성장을 통해 이뤄진 만큼 그 후유증이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시대변화가 초래한 마을 공동체와 가정의 해체에 대한 반발로 마을만들기가 시도되고 있다고 본다. 또한 본격적으로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마을만들기의 정치적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현대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면서도 몸으로 느끼는 현대문명의 문제, 실패에 대한 대안으로 추구하는 대안사회, 대안적 가치의 실현을 마을만들기를 볼 수 있다. 한국교회도 마을만들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일부 교회들은 마을만들기, 마을목회의 모범사례들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마을목회 이전에는 지역사회선교라는 시각으로 마을에 접근했었다. 그런데 지역사회선교에는 여전히 교회 중심적 관점이 남아 있는 데 반해 마을목회는 마을이 중심이 되고 교회는 마을을 형성하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 기여하는 마을의 한 기관으로 여긴다.

이 글은 마을만들기의 맥락에서 마을목회를 이해하고 그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II에서는 마을만들기의 배경과 정의, 주요사례와 특징, 의의, 과제와 한계를 살피고자 한다. 마을만들기는 마을의 특징이나 상황, 주민의 욕구에 따라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마을만들기가 진행되어 왔다. 교육, 경제, 문화, 생태, 정치 등으로 접근방식을 분류하여 그 사례들을 제시하고 이러한 마을만들기의 특징과 의의와 과제와 한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III에서는 마을목회의 사례들을 주체에 따라, 마을을 살리는 기독교 공동체, 마을을 살리는 교회. 소수자들과 함께 마을을 일으키는 교회, 마을의 경제를 살리는 기독교 기관으로 분류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IV에서는 마을목회의 성서적 근거와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마을만들기와 마을목회를 선교의 관점, 특히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서 볼 때 마을목회는 마을 주민의 일치와 구원, 마을 생태계의 일치와 구원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것이 마을목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의 단위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 하나의 국가, 지역사회/마을이기 때문에 에큐메니칼 신학을 마을/지역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본래부터 지향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의의는 마을만들기의 맥락에서 마을목회를 바라보고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점이다. 그러나 주제가 워낙 광범위하고 제한된 시간에 이뤄진 연구이기 때문에 이 글은 본격적 연구를 위한 예비적 시도로 볼 수 있다. 아쉬운 것은 마을목회의 최근의 주요 사례들을 제시하지 못한 점과 마을만들기에 대한 최근의 평가와 제안들을 포함시키지 못한 점, 그리고 지역사회선교와 마을목회의 관계를 규명하지 못한 점 등이다.

II. 마을만들기의 배경, 주요 사례, 특징과 의의

1. 마을만들기의 배경과 정의

서울시 마을공동체종합지원 센터는 마을만들기 또는 마을공동체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는 이유를 급격한 도시화와 경제성장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문제 대두, 지방자치 시대의 도래, 개발중심의 도시정책으로부터 주민의 참여와 자치를 지향하는 도시정책으로의 패러다임 변화 등으로 제시했다. 조한혜정은 근대와 후기근대의 패러다임 전환에서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근대 초기는 새집을 짓는 시기다. 16세기 이후 ‘봉건’이라는 집을 부수고 ‘근대’라는 새집을 미친 듯이 지어 나갔다. 이 과정은 고향과 과거와 결별하는 과정이었고, ‘끝없는 발전과 진보’를 믿는 ‘근대인’들은 도시의 아파트에 입주했다. 아파트 평수를 늘리다보니 이웃도 친구도 없어졌다. ‘후기 근대’, 또는 ‘탈근대’에는 경제성장이 멈춘다. 그때 그들은 도시적인 것, 새것, 반짝거리는 것을 촌스럽게 보게 된다. 그들은 다시 고향을, 자신의 역사를 대면하게 된다. 이제 새것, 크기와 관계없이 어렸을 때 느꼈던 따뜻함과 배려와 즐거운 기억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 한다. 일부 청년들은 인디와 언더 문화, 인터넷과 대안교육 영역에서 돌봄과 소통과 나눔이 가능한 창의 노동을 하면서 사회곳곳에 생명의 씨앗을 뿌려왔다.

경제적으로 건강한 사회는 상호 호혜, 재분배, 교환이 모두 활발히 이뤄지는 사회다. 근대의 파탄은 시장에 의한 교환 경제가 과도하게 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존경, 신뢰, 보살핌 등 자발적 관계와 상호 호혜적 관계를 소멸시키고 있다. 국가에 의한 재분배 구조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달라지는 데, 식민지적 근대화에 이러 고도 압축적 경제성장 과정을 거친 한국사회는 생산적 복지에 대한 고려 없이 하드웨어 중심의 토건국가를 형성해왔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대단지 아파트 건축, 최근에는 뉴타운 건설계획 등에 매진해왔지만 후기 근대적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아파트가 아니라 마을이고, 소비를 과시하기 위한 이웃이 아니라 소통과 나눔을 통해 상호 호혜적 관계를 맺어가는 이웃의 형성이다.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청년들이 살고 싶은 마을은 ‘돌봄과 학습이 있는 주거’, 사회복지, 노동복지, 학습 복지를 모두 아우르는 마을이다. 이런 마을은 “생태적 한계를 인식하고 사회적으로 호혜?협동의 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경제적으로 지속가능한 대안을 모색하는”대안사회로, ‘생태’는 “단순히 자연이나 환경을 의미하기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연의 한계 안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공존 공생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리킨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의 행복은 “자급하는 가계(oikos)의 충만함만이 아니라 자치하는 시민(polis)의 충만함”에서 온다고 보았다. 인간의 행복은 외부적 선(경제)의 충족, 행복을 위한 최종적 단계의 삶인 관조적 삶, 그리고 외부적 선을 집합적으로 조달하고 관조적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삶을 동시에 만족시킴으로써 자기충족성을 갖는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정치적 삶이 정치적 덕에 근거할 때만 정치적 삶이 관조적 삶과 연관될 수 있고 일과 여가를 순환시키며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그러나 근대는 정치적 삶이 지나치게 외부적 선을 충족시키는 일에 매몰되거나 정치적 덕 대신에 권력을 정치의 핵심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했다. 이처럼 후기 근대에 요구되는 마을은 경제적 필요 뿐 아니라 관조적 삶(철학/인문학)과 정치적 덕에 근거한 정치적 삶, 생활정치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근대는 발전을 통해 풍요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어렵다.

유엔인간환경회의는 1972년에 발전의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지속가능한 발전’은 발전과 생태, 성장과 분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생태계 보존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국가와 시장에 의존하는 공동체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킬 때 가능해진다. 즉 “국가는 분권화된 자치공동체로 재구성되어야 하고, 시장은 무한대의 확장이 아니라 자족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야 한다.”이러한 자치공동체와 경제적 자급은 위(중앙국가)가 아니라 아래(지역, 마을)로부터 이뤄져야 한다. 돈과 상품의 생산을 통해서가 아니라 주민 스스로가 직접 삶을 생산, 재생산하는 삶이어야 하기 때문에 마을이 중요하다. 21세기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마을은 입시지옥과 학교붕괴에 대한 대안교육, 상호 호혜, 재분배와 교환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대안 경제, 문화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안문화, 자신과 공동체를 생태적으로 보고 재구성하는 생태마을,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생활정치를 지향하며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웃들의 관계망”이다. 쉽게 말하면 “애들 내놓고 다 같이 키우며 사는 이야기를 수다로 풀다가 문제가 생기면 함께 고민하고 대안을 찾아 실행하는 이웃들의 관계망이다.”

2. 마을만들기의 사례들: 접근방식에 따른 사례

마을만들기는 위에서 정의한 대로 주민들의 주요 관심사나 상황에 따라 대안교육, 대안경제, 대안문화, 생태마을, 생활정치 등을 지향하는 마을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을이 형성된 역사가 오래되면 다양한 관심사들이 나타난다. 이를 통합형이라 부르고자 한다.

1) 아이와 학교를 살리는 마을: 마을이 학교다

학교폭력 문제나 공교육의 붕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면서 마을이 형성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마을만들기의 모토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이다. 평화 샘 프로젝트는 책임연구원 문재현의 두 아들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그 대안을 찾다가 노르웨이의 단 올베우스의 대안을 한국 교육 상황에 맞춰 조정한 학교폭력 대안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학교폭력 문제, 특히 일진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족과 학교, 마을(지역사회)이 하나의 열린 체계이며 환경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학교가 마을(지역사회)에 열려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학교가 방어적 태도를 취해 지역사회의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폭력, 일진 문제 해결이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에서 마을 사람들이 학교를 비난하지 않고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례들을 제시한다. “학교와 달리 마을 사람들은 일진이나 위기 청소년들에 대한 문제를 인정하는 데도 적극적이었고, 아이 하나를 처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환경을 바꾸어주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마을 사람들에게 아이들을 돕자는 제안에 대해 마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해서 동네 차원의 네트워크가 불과 몇 달 만에 이뤄졌다.

“마을공동체 프로그램은 참여자 대다수가 소통과 참여, 보살핌을 통해서 서로를 인간으로 발견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되었다.” 평화샘 프로젝트의 마을공동체 매뉴얼은 ‘위기 개입 매뉴얼’과 ‘근본적인 예방 대책’이라는 두 가지 영역을 중심으로 한다. 마을에서 위기개입은 놀이터 등에서 일진 아이들이 아이들과 주민들을 위협하고 물갈이 등 일탈 행위를 할 때 주민들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근본적 예방 대책은 마을을 보살핌의 공간으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일진과 왕따를 만들어내는 요인은 학교 요인 뿐 아니라 가족 요인, 마을공동체 요인도 있다. 따라서 근본적 예방 대책은 지역사회의 소통과 가족, 학교, 마을의 보살핌 망을 구성하고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이 지역사회에서 광범위한 대화 구조를 창출하고 새로운 의견 형성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 책은 건강한 마을 만들기 주민 네트워크가 발족된 사례와 매뉴얼을 제시하고, 아파트 단지에서 아파트 공동체 사례와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다. 박원순은 『마을이 학교다』라는 책에서 풀무학교, 성미산 학교, 이우학교, 하자센터 등 대안학교, 남한산 초등학교와 같은 공교육의 대안 사례, 기차길옆 작은 학교와 같은 청소년 교육공동체,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등과 같은 새로운 교육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토건국가를 넘어서서 가족이나 학교가 돌봄과 보살핌의 공동체, 배움의 공동체가 되어 마을을 살리는 길을 제시한 책도 있다.

2) 마을(도시와 농촌)을 살리는 경제: 마을 회사

마을을 살리는 경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마을 카페와 같은 사업과 협동조합과 같은 사회적 기업이 있다.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자리잡은 마을기업 A카페는 2011년 11월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공모에 선정되면서 문을 열었다. 서대문 일대에서 독거노인 반찬 나눔 등 자원봉사 활동을 벌이던 주부들이 주축이 되어 바리스타 교육을 받은 후 카페를 열었다. 마을카페 경제의 핵심은 매출이 아니라 카페를 통해 마을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만들고, 마을 내에서 돈이 순환될 수 있다면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 된다고 본다. A카페는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게 하는 것, 즉 마을 사랑방이 되게 하는 것이 목표다. 마을기업도 지속가능성을 위해 수익원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위치한 세움 카페와 ‘목화송이’는 2011년 도봉구 마을기업 1호로 선정되었다. 여성건강과 환경보호를 위해 대안생리대 사용 캠페인을 벌이는 시민단체인 ‘피자매연대’로부터 기술을 배운 주민이 면 생리대 제작과 판매를 하는 ‘목화송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2012년 1월 기준 월매출은 1200만원이었다. 라오스에 있는 여성들에게 면 생리대를 보내 적이 있고, 앞으로는 북한과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면 생리대를 보내려 한다. 한 조합원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보려고 ‘목화송이’에 들어오게 됐다.”고 했다.

2007년 희망제작소는 완주군청과 공동으로 완주 커뮤니티 비즈니스 센터를 만들어 운영해 왔다. 그 후 100개의 마을회사가 완주군에 만들어졌고 점차 매출과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이 개념이 전국에 확산되었고 최근에는 중앙정부도 마을기업을 추진하고 있다. 커뮤니티 비즈니스 사업(마을회사)은 희망제작소가 전국을 돌면서 “자기 지역의 고유한 자산을 기초로 다양한 사업을 벌이면서 지역 경제의 미래를 만드는 독특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우리의 전통적 지혜와 마을의 특성을 살려 내는 사업들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이것이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제안된 사업이었다. 이런 사업이야말로 “지역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이며 그것이 동시에 마을의 일자리 창출, 마을 공동체의 형성, 지역 복지의 근간임을 알게 되었다.”

『마을회사』는 전통적 제염방식을 사용한 소금, 지역산 돌미역 등을 통한 향토적 기업들, 식품가공에서 대안을 찾은 마을회사들, 윤리적 소비를 하는 단체, “시민경제, 시민자본, 대안경제를 만들어 내는 소중한 씨앗들”인 협동조합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전남 광양 다압면 매화마을에서 청매실농원을 운영하는 홍쌍리 여사는 “땅이 살아야 농민과 도시민이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다고 믿”어서 “유기농법으로 땅을 살려 밥상을 약상으로 만들려고 긴 세월을 노력했다.”이처럼 “농촌 (마을)의 희망은 신념을 가지고 인내를 하는 농민에게서 나온다.” 인터넷을 통해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무공이네는 신뢰를 가장 중요시한다. 자신이 신뢰를 받기 위해서 “착한 생산자, 현명한 소비자, 투명한 유통 업체가 함께 유기농의 참뜻을 실천해야 한다.”왜냐하면 “유기농은 생명을 존중하고 세상을 더불어 살아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무공이네는 유기농 상품 유통을 넘어 유기농의 뜻을 함께 나누는 활동을 해 왔다.” 그러나 농촌 마을을 살리기 위해서는 농협이 농민을 위한 농협으로, 금융 사업보다는 경제 사업에 주력하는 농협으로 개혁되어야 할 뿐 아니라 정부의 농업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북 진안군청에서 마을만들기를 담당하는 공무원 구자인 박사(마을만들기 전공, 농학박사)의 사례는 의의가 크다. 그는 주민과 행정 사이에 가교 역할, 즉 주민에게 행정 정보를 알려주고 행정에서는 주민의 의견을 관철하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통해 주민이 주도하여 밑에서부터 마을을 만들어 가는 일을 지원했고, 이런 역할을 할 ‘마을 간사’제도를 도입하여 귀농자 가운데 선발하여 마을 간사를 2년간 12명 훈련하여 6명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주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는 것이 마을만들기의 핵심이라고 말한다.”이를 위해 마을 간사를 키워낸 것에 그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협동조합의 성지’라 불리는 원주는 1954년 장일순을 중심으로 교육운동을 전개했고, 1965년 지학순 주교와 함께 교육사업을 통해 주민을 의식화시키려 했다. 1966년부터 신용협동조합과 소비자협동조합을 시작했고, 1970년대에는 생명운동과 가톨릭농민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대에 원주는 유기농산물을 직거래 하는 소비자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2002년 여러 협동조합들이 모여 원주의료생협을 창립했다. 2003년에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를 창립했다가 이를 2009년에는 원주협동사회경제네트워크로 확대했다. 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는 경제적 활동 뿐 아니라 소식지를 발간하고, 시민문화강좌를 진행하고, 2005년에 친환경 농업지원 육성을 위한 조례, 학교급식조례, 보육조례 등 3대 조례제정운동을 벌였다. 이처럼 협의회와 네트워크는 “조합원, 회원, 노동자만의 역량강화가 아니라 원주 지역사회의 강화를 목표로 삼고 있다.”이는 지역사회의 자급을 위한 것이다. 이는 “협동조합운동이 단순히 조합원의 이익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자급의 관점을 지역사회에 실현하려는 조직임을 보여준다.”즉 원주의 협동조합들과 사회적 기업들은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뿐 아니라 호혜적 관계를 만들고, 조례 제정 등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며, 녹색도시, 대안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로컬푸드나 대안에너지운동 등 거대 자본에 대항하여 주민참여의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자연생태계와의 조화를 이루는 그린비지니스를 확대하여 생명도시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3) 마을을 살리는 문화

문화와 예술로 활력을 되찾은 전통시장이 있다. 1970-80년대 산업화의 메카였던 구로공단이 사라지면서 침체기를 맞았던 서울 금천구 남문시장은 재래시장이었다. 이 시장이 활력을 되찾은 것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의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인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부터다. 문화사업단은 초기에는 상인들과 친해지는 과정을 거쳤다. 2011년 5월 ‘시장통 문화학교’라는 이름으로 기타와 밴드, 합창, 중국어, 풍물과 스윙 댄스 등 동아리 활동을 했다. 2012년 7월에는 남문시장 동아리 발표회를 열었다. 2011년 12월부터 5개월 동안 상인들과 예술가들의 만남이 이뤄져 5개 점포에 각각 예술가 1명이 파트너로 참여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통해 매출에 기여했다. 이러한 시장통 문화학교, 시장 축제 등을 통해 상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 부산의 반송마을은 벽화그리기를 통해 마을만들기가 초기에 큰 동력을 얻었다. 1997년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회원은 옹벽이 너무 지저분해 벽화를 그리기로 하고 높이가 높아 전문가에게 맡겼다. 완성된 후 주민들의 반응이 좋았고, 주민들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98년에는 회원들 스스로 동화를 주제로 벽화를 제작했다. 이후에 회원들은 놀이터와 공터, 초등학교 벽에 벽화를 그렸다. 이를 통해 주민 스스로 주체로 나서서 자신의 손때가 조금이라도 묻게 되면 마을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4) 생태마을로의 전환: 마을, 생태가 답이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삶의 방식 뿐 아니라 마을 전체를 생태적으로 전환시키는 것을 지향하는 생태마을은 현대사회의 대안을 생태로 이해한다. 박원순의 『마을, 생태가 답이다: 환경을 생각하는 생활문화공동체』는 생태 자체를 중심으로 만드는 마을, 생태 체험 관광으로 자연도 살아나고, 주민의 살림살이도 살아난 마을, 도시 농업을 전개하는 도심 속 마을, 친환경 신재생 에너지를 마을만들기에 접목시키는 마을 등, 생태학교, 생태마을, 체험 관광 마을, 에너지 자립마을이나 공동체를 소개한다. 연두농장의 변현단 대표는 ‘농업’이라는 말조차 농사일을 하나의 사업으로 보기 때문에 ‘농업’대신에 ‘농’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농’의 철학은 삶의 대안으로 화폐가 필요 없는 농, 삶을 치유하는 농,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삶을 지향한다. 농업으로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것도 결국 자본에 종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그 종속의 고리를 끊는 삶이 농에 있다고 믿는다. 그는 처음에는 기초생활수급자들과 함께 연두농장을 시작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스스로 가난해지기를 원치 않았고 편리한 삶을 추구하고, 소비의 욕망의 포로가 된 것을 보았다. 그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 했다. 연두농장이 중요시 하는 것은 순환형(전통) 농업, 토종종자 보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생태교육 등이다.

경북 의성군 교촌이 교촌체험마을로 거듭난 계기는 교촌초등학교가 1994년 폐교된 것이었다. 시골 마을은 보통 학교가 마을의 구심점인데 폐교가 되면서 구심점이 사라졌다. 2002년 주민 총회를 열어 폐교를 수련원으로 활용하자고 뜻을 모았고 56명의 주민이 1억 8천 만 원을 모아 폐교를 구입했다. 주민들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외부에 컨설팅을 받았고, 전국에서 최초로 사무장 제도를 도입해 대구 놀이디자인연구소의 송종대 씨를 사무장으로 초대했다. 그는 농촌체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기완결 구조라 결론을 내렸다. 즉 “과거의 농촌은 식료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등 마을 안에 완결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농촌체험은 “소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농촌 마을의 자기 완결적 구조를 통해 산업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험을 하자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교촌농촌체험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과의 만남을 시도했다. “자연은 어머니의 품과 같아 경쟁 사회 속에서 상처 받은 사람들을 품어 줄 수 있다는 개인적 확신”을 갖고 진행했다. 농촌 체험 프로그램의 방향을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고 전래 놀이를 복원하는 것”으로 정했다. 놀이 전문가인 그는 전래 놀이가 형식은 있지만 내용이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놀이의 내용을 주변의 자원에서 가져온다는 전제가 있다. “체험의 시작과 준비와 과정과 내용을 모두 스스로 하도록 하고 있”다. ‘농촌올림픽’은 농촌 농기구나 도구들을 이용한 운동회다. ‘이장님 숙제’는 체험객들로 하여금 마을 주민들과 관계를 맺게 한다. 이렇게 해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이 시대 선생님으로, 교육의 주체로 복귀시키고 있다. 그는 교촌체험마을의 가장 큰 성과로 마을 공동체의 회복을 들고, 참된 마을만들기는 단순히 소득을 늘리거나 주민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을 주민이 행복한 마을을 만드는 것이라 한다.

경남 산청 민들레공동체는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와 친환경 천으로 수공예품을 만드는 ‘민들레공방’, 마을기업으로 문을 연 ‘민들레베이커리’, 에너지 자립을 돕는 ‘대안기술센터’로 이뤄져있다. 대안기술센터는 “대안기술을 통해 공동체의 온전한 자립을 돕는 한편,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기 위한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공동체 대표 김인수 박사는 신앙공동체로 시작했다가 농촌으로 들어오면서 마을 기반의 활동으로 변화하면서 “사람이 살만하고, 외부의 자본이나 어떤 힘에도 휘둘리지 않는 지속 가능한 마을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대안기술은 적은 에너지로 누구나 쉽게 만드는 기술로 공동체의 자립을 위한 근간이 되고, 생태적 삶을 살게 하며, 제3세계 빈곤 문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기술과 에너지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소비를 줄여 나가며 삶의 형태를 바꾸는 일이 동반 되어야 한다. “기술과 문화, 삶의 스타일 전체가 함께 바뀌고 함께 가는 살아 있는 모델로서의 공동체 마을 전체가 교육장”이다. 대안 자립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에너지 관점에서의 지속 가능성뿐만 아니라 공동체 자체의 지속가능성, 생산과 소비의 자립성과 지속 가능성”이다. 민들레공동체와 대안기술센터는 다음 세대의 대안적 모델이 되기 위해 “새로운 경제 시스템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모험”을 함께 안고 가려 한다.

5) 마을을 살리는 생활정치

서울 성북구 김영배 구청장은 민선 5기(2010-2014) 선거 슬로건을 ‘권력정치에서 생활정치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내세웠다. 구청장으로 당선된 후 그는 마을 공동체의 회복, 이웃을 돌보고 배려하는 복지공동체 형성, 아동친화안심도시 형성 등의 시대적 과제에 직면했다. 그는 이런 문제들에 직면해서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그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을 돕고 지원하는 것이 정부의 책임과 의무라고 여겼다. 시민과 정부의 관계는 권리와 의무의 관계라고 보았다. 인권 도시를 위한 조례 제정과 주민인권선언, 주민참여 예산제, 열린 정책토론회, 각종 아카데미 등 많은 시도와 노력들이 사람의 도시를 향한 주춧돌이 되었다. 그는 권력을 “마을에서 시민의 생활을 지키는 공공성의 파수꾼”으로 이해한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치를 “공공성의 정치, 생활정치, 마을정치”라고 했다. 성북구는 201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유니세프에 의해 아동친화도시로 선정되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시민적 권리의 주체로서 아동의 생존권(친환경 무상급식), 보호권(구립돌봄센터), 발달권(자기주도 학습센터), 참여권(어린이청소년의회 운영) 등을 제시하고 있다.

성북구는 자치구 최초로 2011년 인권 전담부서를 신설하고, 인권증진기본조례를 제정하고, 인권교육 및 인권영향평가를 제도화 하는 등 인권도시로 거듭났다. 2013년 개관한 성북아동청소년센터는 관내 160여개 아동?청소년 교육?복지시설 간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성북구는 2012년 ‘오신가스 없는 성북’을 선언하고 ‘에너지 절약이 곧 발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성북절전소’를 운영하고 있다. 2012년 3개소를 시작으로 2013년 28개소가 운영 중이다. 사회적 양극화 해소의 출발로 2013년부터 전국 최초로 생활임금제를 시행하고 있다. 2012년 11월부터 ‘안심귀가 마을버스’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 제도는 밤 10시 이후 마을버스가 정류장이 아닌 곳이라도 귀가가 편한 곳에 하자하도록 운영하는 제도다. 사회적 기업, 마을기업의 자생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제품 구매촉진 및 판로지원에 관한 조례’제정, ‘사회적 경제제품 의무 구매 공시제’를 통해 사회잭임 조달제도를 수립했다. 성부구는 사회적 기업 허브센터와 사회적 경제과 신설을 통해 사회적 경제를 선도하는 사회적 경제 클러스터를 구축 중이다. 2010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을만들기 사업은 도시아카데미를 통한 교육사업을 시작으로 마을만들기 지원조례제정, 마을만들기 사업 전담팀 구성, 마을만들기 지원센터 개소 등을 통해 2012년과 2013년 연속으로 마을공동체사업 서울시 최우수구로 선정되었다.

6) 통합형

‘마을만들기’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마을 중의 하나가 서울 성미산 마을이다. 그런데 성미산 마을은 공동육아로부터 먹거리로, 먹거리로부터 마을기업으로, 방과후 교육에서 대안학교로, 그리고 생태 환경운동과 마을축제, 문화와 예술로까지 확대되어 가며 이뤄진 과정이자 결과물이다. 이런 전환에서 생협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마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가족의 관점에서 보면 “재현아 너 한번 잘 키워 보겠다고 성미산 마을로 이사 왔는데 실은 엄마 아빠가 훌쩍 커 버렸다.”는 저자의 고백처럼 마을의 형성과 발전은 또한 마을 주민들, 가족의 성장과 성숙을 동반한다. 그런데 주민들의 욕구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는 과정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성미산 마을은 주민들 사이의 갈등뿐만 아니라 성미산을 배수로 용지로 개발한다는 서울시(상수도사업본부)와 학교 부지로 개발한다는 홍익대학교를 상대로 개발 반대 투쟁을 했다. 특히 서울시와는 120일 산상 철야 농성을 하며 백골단과 싸우기도 했고, 포클레인을 멈추게 하기 위해 맨 몸으로 저항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공동육아 식구들(마을 형성하는 주체)과 지역 어르신들(원주민들)과의 화해가 이뤄졌다. 그리고 산을 지키는 싸움인줄 알았는데 결국 산이 주민들을 살리는 체험을 했다. 주민들과 산의 화해가 이뤄졌다. 대안학교의 경우 세 번 엎어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완성되었다. 대안학교 교사들 사이의 갈등, 교사와 학부모 사이의 갈등, 마을 학부모와 마을 밖 학부모 사이의 갈등을 겪은 후에 정착하게 되었다.

3. 마을만들기의 특징

마을만들기는 이름과는 달리 일부 주민들에 의해 기획되어 마을이 만들어지기보다는 주민들의 욕구에 대응하다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때로는 주민들이 마을의 형성을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성미산 마을이 그런 경우다. “우린 한번도 ‘마을을 만들어 보겠다’고 미리 모여 계획하거나, 소위 ‘청사진’이란 것을 그릴 시간도 주변도 그리 없는 사람들이었다.”“일하는 엄마들에게 무엇보다 간절한 종일반 어린이집을 만들면서 그 주변에 모여 살게 되고, 그도 부족하여 야근하는 엄마들을 위해 품앗이 육아망이 절로 생겨나고, 지역과 함께 자라고 싶어 방과후교실에 대안교육까지 시도하고, 기존 제도 교육에 회의를 느끼던 엄마 아빠들이 팔 걷어붙이고 같이 하겠다 모여들어 시작된 마을이”다. ‘성미산 마을’이라는 이름도 “우리가 스스로 명명한 것이 아니다. 나름 그 ‘업계’에선 유명한 ‘성미산투쟁’이후 시민사회에서 우리를 ‘성미산 지킴이’나아가 ‘성미산마을’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모든 마을이 이렇게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지만 프로젝트를 통해 마을을 만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마을만들기는 성미산마을처럼 절박한 필요를 느끼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대안을 만들고 다음에 생기는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련 주민들의 관계가 심화되고 친밀해지면서 다른 주민들이 필요에 의해 동참하고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나아가는 과정이자 결과다. 그래서 마을의 형성과 성장은 주민들의 성장과 주민들의 신뢰 관계의 형성과 친밀한 관계망 형성 및 관심사에 따른 다양한 이웃 관계망의 네트워크라 할 수 있다. 둘째, 마을만들기는 자발성 못지않게 마을 주민들의 관심사나 마을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접근방식이나 시작점 등에 있어서 다양성을 지닌다. 공동육아나 자녀교육의 문제해결이나 대안교육을 통한 마을만들기, 마을기업을 통해 마을의 경제살리기로서의 마을만들기, 대안문화를 통한 마을만들기, 지역주민의 자치공동체의 생활정치를 통해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마을만들기 등 다양한 접근방식이 있다. 마을만들기의 시작점은 성미산마을의 공동육아와 어린이집의 학부모들, 청주의 평화샘 프로젝트의 마을공동체연구소, 주민과 군청 사이에 다리를 잇는 진안군청의 공무원 구자인 박사, 협동조합의 조합원이나 마을회사의 사장, 교촌체험마을의 주민들과 사무장 송종대 씨, 서울 성북구 김영배 구청장 등 다양하다.

셋째, 마을만들기는 대안사회와 대안적 가치들도 중요시 하지만 그런 목표를 이루는 과정으로서 주민들 사이의 소통과 신뢰와 친밀한 관계, 마을 내 다양한 공동체의 개방성을 중요시한다. 여러 마을이나 공동체에서 남녀노소, 사제지간에도 이름이나 직함 대신에 별명을 부른다. 마을을 살리는 학교나 마을기업이나 생태마을은 모두 실적, 결과 못지않게 그 과정에 이뤄지는 주민들,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과 신뢰관계, 궁극적으로는 마을의 회복과 성장, 그 안에서 성장하는 주민들의 행복을 지향한다. 넷째, 마을만들기는 마을을 살리는 학교든 마을회사든 생태마을이든 대안문화든 생활정치든 인적, 물적 자원을 마을 안에서 찾으려는 자족성을 지닌다. 간혹 외부에서 인적, 물적 자원을 빌려오더라도 마중물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바꿔 말하면 자족성은 마을의 주민들이 주민 스스로에 대해, 마을의 자원과 문화 등에 대해 신뢰하고 있음을 뜻한다.

다섯째, 마을만들기에서 주민들이 어느 한 관심사로부터 다양한 관심사들로 발전하는 계기는 자녀양육과 교육인 경우가 많다. 이는 직업이나 관심사나 계층적으로 다양한 학부모들이지만 자녀교육은 주민들을 묶어줄 뿐 아니라 교육을 토대로 마을의 다른 문제로 넘어가는 디딤돌을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여섯째, 마을만들기는 주민들의 창의성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마을기업만 “남들이 가지 않는 새 길을 개척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살리는 학교활동이나 대안문화활동, 생태마을, 생활정치 등 어느 하나도 똑같은 과정이나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마을의 상황 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이나 가치관, 열정의 차이, 그리고 마을 안 다양한 공동체의 관계, 주민들의 신뢰 관계 정도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마을만들기는 다양한 관심사를 해결하는 과정과 다양한 공동체의 활동을 통해 마을이 이뤄지고, 마을의 활동이나 관심영역이 커져가는 통합성을 지닌다. 마을만들기의 역사가 오래된 마을을 위에서 통합형으로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4. 마을만들기의 의의, 과제와 한계

1) 마을만들기의 의의

마을만들기는 위로부터의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기후변화로 인한, 분단으로 인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계급차별, 성차별, 인종차별 등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응하는 주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대응이다. 둘째, 마을만들기는 대안사회와 대안적 가치를 추구한다. 주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대응은 국가 권력의 일방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분권화된 자치공동체로 거듭나 풀뿌리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시장의 경제주의로부터 벗어난 마을 단위로 상호호혜와 재분배를 강조하고 마을의 인적 물적 문화적 자원에 기반한 사회적 경제활동을 통해 자족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지향하고, 소비주의 문화나 획일적 일방적 문화를 벗어나서 개인의 정체성과 지역의 공동체를 살리는 문화를 지향하고, 입시지옥, 사교육과 경쟁으로부터 벗어나 소통, 참여, 돌봄과 배움의 공동체로 거듭나는 학교, 가족과 학교와 마을이 열린 보살핌과 돌봄(복지) 망을 지향하고, 소외와 배제와 승자독식의 사회관계가 아니라 소통과 나눔과 상호 호혜의 이웃 관계를 지향하고, 주민의 삶의 방식 뿐 아니라 로컬푸드, 대안에너지운동, 그린비지니스 등을 통해 마을을 생태적으로 재구성하는 생태마을을 지향한다.

셋째, 마을만들기는 대안사회와 대안적 가치를 지향하되 마을 주민들이 그런 사회와 가치를 이루는 다양한 방법을 용납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나 관심사에 따른 다양한 소공동체를 존중한다. 바꿔 말하면 마을은 소공동체들의 네트워크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관심사에 따라 강한 연결망이 있고, 약한 연결망이 존재한다. 생태계가 강한 연결망과 약한 연결망이 공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순환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처럼 “마을 역시 강한 연결망과 약한 연결망이 서로 연결되어 공존하는 사람들의 관계망이다.” 공동체는 함께 지향하는 가치나 목적을 구심점으로 형성되지만 구성원들 사이의 코이노니아가 또 다른 초점이기 때문에 공동체 안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다.

이처럼 마을은 소공동체들의 네트워크라 할 때 지향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의 차이나 그를 성취하려는 방법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나 마을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구성원(주민들) 사이의 코이노니아 (친밀한 신뢰 관계 때문이다. 따라서 마을만들기에서 중요한 것은 드러난 가치나 지향하는 대안사회 못지않게 마을 주민들 사이의 신뢰관계와 친밀한 관계다. 그래서 마을만들기의 가장 큰 성과를 마을 공동체의 회복이라고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내 아이를 가장 잘 키우는 방법은 내 가정과 내 학교만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학교와 마을(지역사회)이 내 아이와 마을의 모든 어린이, 청소년을 향해 열린 관계를 형성하고, 삼자간 대화와 소통이 이뤄지고 모든 아이와 청소년을 돌보는 네트워크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넷째, 마을만들기는 아래로부터의 자급과 자립을 통해 자기완결적 마을을 지향한다. 먹거리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에너지를 생산하고 소비하고,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되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하고자 노력한다. 이런 면에서 마을만들기는 도시보다 농촌이 유리하다고 할 수 있다. 도시농업이나 도시의 다양한 시도도 중요하지만 생태마을은 농촌에서 활성화되고 있다. 다섯째 마을만들기는 마을의 엘리트나 관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 즉 마을의 ‘보통’주민들에 의해 이뤄진다. 부산의 반송마을은 철거민들의 집단 이주민 마을로 교통문제나 교육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 남은 주민들은 소외감으로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렇지만 일부 주민들이 ‘반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소식지를 만들고 벽화를 그리고 다양한 만남과 문화행사, 축제 등을 통해 주민들이 마을에 애정을 갖게 하고, 산업폐기물 매립장 반대운동을 통해 주민들이 단결하게 되고, 풀뿌리 민주주의인 지방선거에서 지방의원을 당선시켰고, 마을주민들이 힘을 모아 교육 복지 문화가 함께 하는 좋은 학교 만들기 등을 통해 부산시가 후원한 주민자치박람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제까지 소외된 마을의 대명사였던 반송마을이 “이제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마을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나섰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 마을이 부산에서 최고였”다. 여섯째, 마을만들기는 주민이 주체가 되어 이루는 것이지만 주민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주민과 관이 협력하여 마을의 목적을 이루는 협치, 거버넌스로 이뤄진다.

2) 마을만들기의 과제

마을만들기의 가장 큰 과제는 관 주도를 극복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길이다. 마을만들기 사업이 주민의 자발성을 끌어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문재현은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사업의 주체가 공무원, 학자, 단체 활동가이고, 주민들은 들러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마을 상황에 따라 사업에 변화가 요청될 때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워 돈만 낭비하거나 오히려 돈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공동체가 깨지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 주민들 중 가족이 함께 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가족은 마을의 모든 세대와 소통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마을만들기 사업의 단위가 대부분 시?군?구 단위, 기초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도 문제다. 그렇게 큰 단위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실존적 상황과 그런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단위에서 만들어진 사업이 마을 주민들의 내적 요구와 교류의 계기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진정한 공동체 운동은 자기 돈과 시간, 손과 발을 놀려서 공동체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함께 구성하는 것이다. 셋째 예산을 지원받는 사업이 마을 공동체를 살릴 수 있는지도 검토해야 한다. 소소하게 즐기는 일상 대화와 거기서 기쁨을 얻는 것이 공동체다. 소소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사이에서 사업만 하려 할 때 개인의 욕구와 심리가 존중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열리지 않고 인간관계가 갈등으로 접어든다. 반면에 소소한 대화가 통하면 어렵고 복잡한 문제도 별 갈등 없이 해결된다. 넷째 마을만들기라는 말의 문제다. 진정한 마을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마을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창복은 관 주도의 마을만들기 정책의 문제로 칸막이 행정, 형식적 거버넌스, 조급한 성과주의들 들고, 대안으로 주민 주도형 마을만들기, 주민 주도를 위한 행정개선, 지원절차에서 준비 과정을 지원하는 인큐베이팅제(교육, 상담지원) 도입, 깔대기식 지원, 포괄예산제 도입 등을 제시했다. ‘마을스러운’평가지표로 과정 중심 평가, 사람 성장 평가, 질적 평가지표를 제시했다.

마을만들기에서 경제적 자립은 성취하기 가장 어려운 목표 중 하나다. 사회나 마을은 사회적 경제만으로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경제와 공공경제, 사회적 경제와 생태경제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그렇지만 사회적 경제의 비율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전체 사용 에너지 중 친환경 자연재생에너지의 비율이 높은 것은 삶의 질을 높이고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증가시킨다. 이동수는 공동체(마을)의 문제점으로 인간에 대한 낙관적 이해와 주도하는 그룹의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으로 일차 집단화할 우려를 제시하면서 대안을 ‘비어있는 공간’으로 제시했다. 우선 마을만들기 같은 사업/활동은 인간 본성에 대해 낙관주의적 태도를 갖는데 이는 지나친 장밋빛 전망이라고 비판했다. 또 세계적으로 많은 공동체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중산층이 다수로 동질집단인 경우가 많아 낯선 이방인들을 모임이 공동체가 이방인들과 어떻게 함께 사는가에 대한 기술로서의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성미산마을은 다양한 과정을 거치면서 이질적인 주민들이 함께 마을 주민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특히 ‘성미산 투쟁’당시 마을 어르신들이 투쟁하는 ‘주민들’을 지지함으로써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을(공동체)이 대안사회나 대안적 가치만 지향하지 않고 코이노니아를 또 하나의 초점으로 둔다고 했다. 따라서 가치를 공유하는 동질 집단을 넘어서 다양한 관심사를 아우르면서 하나의 마을을 형성해 가는 것이 마을만들기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다양한 관심사를 지닌 주민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며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는 ‘비어 있는 공간’바퀴축이 비어 두었듯이 허브의 핵심요소는 비어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마을을 마을 되게 하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 서로서로에게 비어 있는 공간처럼 생각이나 가치의 우선순위가 다른 주민들을 서로서로 용납하고 받아들여 더 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마을 형성과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3) 마을만들기의 한계

마을만들기는 마을의 자족성을 강조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전 지구적으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연계가 강화된 세상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 지구적으로 인류가, 생태계가 서로 의존하는 세계에서 마을의 자족성만을 강조하기 어렵다. 승자독식의 사회, ‘헬 조선’이라 불리는 전근대적이고 청년들, 여성들,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지옥 같은 사회, 사회적 양극화가 도저히 지탱하기 어려운 수준의 사회에서 경제적 자급, 생활정치, 대안교육, 대안문화의 한계가 있다. 한반도는 남북의 분단과 무력갈등이나 충돌이 상존하는 상황,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고 남한을 종속적 위치에 놓는 군사동맹과 중국과 러시아와 북한의 군사적 협력, 그리고 북핵 위협과 사드 배치 결정, 그로 인한 동북아 긴장 등은 지정학적 위기 상황이다. 기후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위기도 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참사 시 제일 먼저 자살한 사람은 평생을 유기농업을 해오던 농민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간디의 말은 ‘한 마을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전 지구생명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말로 보충되어야 하지 않을까?

III. 마을목회의 사례들

마을목회는 목회자가 교회의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를 넘어서서 교회/기독교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마을의 주민들과 마을 공동체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다양한 모습-마을을 살리는 학교, 마을기업, 마을을 살리는 문화, 생태마을, 마을을 살리는 생활정치 등- 으로 돌보고 섬겨 하나님의 나라를 마을에 이루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목회를 가리킨다.

1. 공동체 형태: 마을을 살리는(형성하는) 기독교 공동체

1) 풀무학교와 홍성지역공동체

풀무학교는 1958년 오산학교 출신으로 기독교 이상사회 실현을 꿈꾸던 이찬갑 선생과 감리교의 주옥로 목사가 충남 홍성군 홍동면 팔괘리에 ‘그리스도인, 농촌의 수호자, 세계의 시민양성’을 목표로, ‘더불어 사는 평민’을 교훈으로 고등공민학교로 설립했다가 1963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로 개편했다. 1976년 한국기독교인 30명이 정농회를 창설하며 유기농업 실천을 결의한 후 풀무학교는 1977년부터 학교농장에서 유기농업을 실시하며 유기농업 교육을 시작했다. 1990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의 평화와 건강개발위원회와 교류하여 농민들에게 유기농업 교육을 실시했다. 1994년부터 오리농법을 도입하여 지속적으로 확대해서 실시하고 있다. 1995년부터 도시 소비자들에게 오리 보내주기 운동을 전개하며 가을걷이를 함께 하는 잔치를 통해 환경농업교육을 전개하다가 2000년에는 환경농업교육관을 건립했다.

교육관 옆에는 풍력과 태양력 발전기를 운용하여 간단한 전자기구를 운용할 수 있는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2001년부터 풀무학교에 2년제 환경농업과 전공 과정(대안대학)을 개설했다. 한편 유통은 1980년 창립한 풀무소비자협동조합에서 감당했는데 1987년에는 이름을 풀무생활협동조합으로 변경해서 생산자조합으로 바뀌었다. 수도권과의 직거래는 1980년대에 경실련을 통해 시작했다. 풀무소비자협동조합은 1995년부터 「홍동소식」을 발간하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1986년 강제로 폐간되었다. 이것이 군 단위 최초 지역신문인 「홍성신문」으로 부활했다. 그밖에 환경방앗간, 농촌생활 박물관, (주)풀무사람들, 풀무 비누공장, 풀무신용협동조합, 홍성 여성농업인센터, 갓골 어린이집, 풀무우유를 운영하고 있다.

풀무학교는 성서, 농업노동, 환경과 생태적 가치를 중시하며 전인교육을 실시하되 공동체 생활을 통해 목표를 이루려는 학교이다. 홍동지역에는 어린이집을 비롯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마을대학인 풀무 환경농업과 전공부가 갖춰져 있다. 이 중 어린이집과 고등학교, 마을대학은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되었으며, 공립학교인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학교 사이에 생태교육을 통해 협력관계가 이뤄지고 있다. 홍순명 선생(전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장)은 풀무학교와 지역공동체의 이상과 지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교육의 목표를 자아실현과 공동체 기여로 설정했다. 온 세상보다 귀한 개인과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차별없는 공동체 형성이 그 토대가 된다. 자연과 사람과의 바른 관계 회복이 생명과 평화의 내용이다.

창조와 역사의 하나님은 전쟁산업을 평화산업으로 바꾸고, 모든 생명의 친화와 농업노동의 기쁨으로 역사를 주재하신다. 설립자는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보고, 농촌의 짐을 지는 것을 고난의 승화로 보았다. 농촌의 수호자를 양성하기 위해 학교와 지역사회는 협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초기부터 생활협동조합과 신용조합을 만들었으며, 유기농업을 발전시켰다. 자연과 사람과의 생태공생의 법칙,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화의 법칙을 준수하는 사람이 될 때 세계시민이 양성되며, 이 근저에는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있다. 21세기는 다양한 토지 조건과 문화의 다양성을 살려 아시아 민중이 연대해야 세계시민이 된다. 아시아에서 세계시민은 단작, 대규모 농업이 아니라 각 지역 기후에 적합한 가족경영, 친환경, 다품목 소량, 지역공동체 농업으로 국민의 건강과 환경문화를 지키고 살려야 하며, 자립에 힘쓰고, 환경, 경제, 사회가 균형을 이루며, 농민의 국제적 연대를 통해 농업을 통한 생명 평화의 지속가능한 사회와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2) 들꽃 피는 마을(가출청소년 그룹 홈)

가출 청소년들을 위한 대안가정으로 1996년에 3 가정이었다가 점차 증가해 현재는 11 가정이다. 김현수 목사는 본래 노동목회를 하다가 1994년 7월 새벽기도회에서 만났던 8명의 가출청소년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선교방향이 노동선교로부터 청소년선교로 바뀌었다. 가출청소년의 세계는 다른 청소년들과도 전혀 다른 세계로 거기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면 청소년 선교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김현수 목사는 이 청소년들을 예수께서 보내신 아이들로 믿고 받아들여 이들과 함께 이룬 대안가정을 처음에는 “예수가정”이라고 불렀다. 청소년 거리의 문화인 절도와 가스, 본드, 약물중독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가족들의 반대나 고통도 큰 어려움이었다. 그러나 대안가정의 동역자들과 지역사회의 이름 없는 다양한 동역자들의 도움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했다. 학교마을에 대한 꿈을 접고 건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난 후 교사를 중시하는 대안학교를 대안가정과 함께 꾸려 나갔다.

들꽃 피는 마을은 어른들이 원하는 나라가 아니라 청소년 ‘자신들이 원하는 자신의 나라’를 만들어 가려는 비전을 지녔다. 즉 청소년들의 세계로 들어가서 청소년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그렇지만 해체가정을 바로 세우는 사명은 들꽃피는 마을만의 일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후원자들의 일이라 여겨 함께 하고 있다. 들꽃피는 마을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대안가정과 대안학교를 만들어 청소년 자신의 나라를 이뤄가고자 한다. 그동안 상가건물에 거하던 들꽃피는 마을은 2004년 센터를 건축해, 공동체의 본부역할, 대안가정들을 하나로 묶는 역할, 사회와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게 했다. 교육은 일반학교로 진학하거나 들꽃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다. 들꽃학교의 경우 아침 묵상으로 시작해서 프로젝트 수업과 인턴 위주 교과 운영 등 대안학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들꽃 피는 마을은 교사가 청소년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들로부터 배우기도 하며, 말이 아니라 삶으로 교육을 하며, 청소년 선교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와 연계되어 이해되어야 하며, 치유공동체, 수다공동체, 기도/영성의 공동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2. 교회 형태: 마을을 살리는 교회

1) 새암교회: 교회와 지역사회

임인수 목사는 신학교 시절에 방문했던 농촌지역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여 1979년 충남 아산만에 있는 작은 마을(150호, 600명)에 새암교회를 개척했다. 어린이집을 시작하여 20년 동안 취학하기 이전의 어린이들을 돌보았다. 마을에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혼한 아들을 대신해 손주를 돌보는 노부부, 장애인, 한부모가족, 알코올중독자, 가스흡입중독 청년과 가족 등, 이들의 착한 이웃이 되고자 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교회신문 제작, 폐수 방류 막기, 채석장의 위험한 작업 막기, 마을 쓰레기 청소, 인권선교, 아산 시민운동, 장애인 탁구교실 봉사, 유기농업을 실시했다. 교회가, 목사가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하자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났다. 새암 어린이집의 아버지들이 여러 가지 쇠붙이들을 가져와 그네, 시소, 미끄럼틀, 작은 구름다리 틀, 철봉대, 앉은 그네 뺑뺑이, 돌리기 등을 제작하여 어린이집 놀이터를 만들어 줬다. 1983년에는 교회 본당을 짓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집(사택)-교회’를 지어 교회와 사택을 함께 사용해왔다. 여러 교회와 미국 한인교회들이 건축비를 지원했으나 인건비가 될 정도는 못되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교회 건축을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왔다. 이들은 기초 작업부터 시작했으며, 작업계획을 스스로 만들어 와서 일을 했다. 부녀자들과 노약자들을 제외한 전 마을 사람들의 자원 노력봉사로 임 목사가 감동을 받았다. 교회가, 임 목사가 지역사회와의 벽을 허물고 먼저 다가가 주민들을, 이웃들을 섬기니까 교인들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변화되어 교회 본당 건축을 자기 집을 짓는 것처럼 힘을 모아 완성시켰다.

2) 장신영농조합: 작은 농촌교회들의 연합

본래 영농조합은 농민이나 농업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법인체이지만, 장신영농조합은 충북 충주지역과 강원도 원주지역의 작은 농촌교회 목회자 8명이 2004년에 모임을 결성했다. 피폐되어 가는 농촌 현실 속에서 농촌교회가, 농민들이, 교인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며, 농촌교회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잘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 장신영농조합을 조직했다. 활동내용은 첫째 농촌교회들의 연합활동(봄 야외예배, 가을 추수감사 한마당잔치 등)이다. 이를 통해 얻은 헌금은 해외농촌선교, 지역구제, 국내농촌선교에 지원되었다. 둘째 목회자가 직접 농사에 참여(4명은 1000평 이상, 4명은 텃밭농사, 모두 유기농)한다. 농사 작목은 벼농사, 밭농사, 과수농사로 한 농가의 연 수입이 500만원에서 1000만원에 불과하지만 농촌목회자와 농촌교회로서는 요긴하다. 농사는 육체적 노동이며 동시에 영적인 기도이기 때문에 목회자들은 농사를 통해 자신의 영성을 계발하고 자신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셋째 농촌교회와 도시교회의 상생을 지향한다.

이들은 도시교회를 농촌목회의 파트너로 생각한다. 도시와 농촌교회의 다양한 교류는 농촌교회와 교인들의 자존감을 높이며, 서로에게 자긍심을 준다. 대등한 협력자 관계가 형성되어야지 시혜의식이나 우월의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넷째 공부와 부부모임, 가족여행 등을 통해 농촌 목회자들과 그 가정을 회복하고 살리는 활동이다. 농촌교회의 희망은 연대와 연합에 있다. 농촌목회는 협력목회이고 팀목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장신영농조합은 조합원 상호간의 인격적인 성숙, 적극적인 교회와 교인들의 참여, 도시교회의 협력, 경제적 자립의 모색, 조직화와 체계화, 지역사회를 향한 활동 등의 과제를 갖고 있다. 장신영농조합은 작은 농촌교회들이 연합을 통해 농촌교회 목회와 선교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본다.

3) 작은교회: 복지/디아코니아를 넘어서 생명농업으로

1983년 대구에서 작은교회를 개척했던 곽은득 목사는 빈민선교와 노동선교에 주력하다가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관계의 구조나 사회관계의 구조로 풀 것이 아니라 자연과 농업의 구조로 풀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세상의 황폐는 우리 내면의 황폐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환경을 해치는 나쁜 버릇을 고치는 근본적 해결책은 존재의 내면을 성찰하는 것이다. 즉 사회운동이나 사회선교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지만 우리 심성은 그 과정에서 오히려 더 황폐해지는 것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남들만을 계몽하려는 건방진 태도가 있기 때문이며, ‘운동’도 사회구조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풍성함을 나누는 일도 중요한데 간과되었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농업적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신학과 운동과 교육은 모두 농업적 세계를 복원하는 일에 복무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1990년대 초부터 목회와 선교의 방향을 생명으로 정하고, 농업을 새롭게 보며, 현대문명세계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농업을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두 가지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사짓는 방식과 삶의 양식이다. 농사짓는 방식은 소규모 다품종 가족농, 유기농, 오리농법 등 전통방식 회복 등이다. 삶의 양식도 자급, 자족, 자립의 생태적 삶의 양식으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래서 그는 생산을 위해 귀농, 도ㆍ농 직거래(유통), 기독교 대안교육(자연학교)이 필요하다고 보아 이를 실천하기 위해 생명마을 만들기를 시도했다.

작은교회는 경북 군위로 1999년에 이전을 하여 매곡리 자연학교를 만들어 어린이, 청소년, 청년, 장년들에게 기독교 영성을 바탕으로 생태적 가치관을 교육한다. 주말가족농사교실을 통해서는 생태적 농사짓기, 가족공동체 실현, 대안교육, 기초살림공부를 한다. 푸른강좌, 영성훈련(몸과 신앙 경건 훈련), 강의 등을 통해 생명지향적 세계관과 농업의 중요성을 몸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깨닫도록 한다. 자연학교는 생태마을 만들기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생활문화장터를 여는데 장터에서는 물건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인격적 시장을 만듦으로써 생명의 해방구를 이루려 한다. 이 장터에서는 농산물과 책과 자료, 살림살이들을 나눔으로써 도ㆍ농 공동체적 생활양식과 인격, 신앙을 갖추도록 한다. 귀농을 장려함으로써 복지를 넘어 생명농업시대를 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귀농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다.

3. 교회와 공동체 결합형: 소수자들과 함께 마을을 일으키는 교회

1) 백운교회와 한마음 공동체

1984년 전남 장성 백운교회에 부임한 남상도 목사는 농산물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기도가 응답되어 풍년이 되었지만 가격폭락으로 인해 저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잘못된 농촌사회 현실을 바로잡는 목회가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목회자 자신의 신학적 변화로 인해 교회는 신자들만의 교회가 아닌 지역사회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교회로 변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농민들과 함께 수세투쟁, 관 주도의 농지개량조합을 직선제로 바꾸는 등 다양한 정의운동을 펼쳐 지역주민들과 농민들과 함께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교회가 되었다. 문화운동으로 교회는 추수감사제를 전 지역농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마을대항 놀이행사를 포함하는 추수감사제를 정착시켰다. 예배에 전통악기와 민요가락을 도입해 토착화 작업을 했으며, 어린이, 청소년, 장년을 대상으로 전통문화 강습도 열었다. 공부방을 포함하여 지역농민들에게 유기농법을 교육하는 교육운동도 전개했다. 1988년 교회 건물을 건축할 때에는 종교를 초월하여 전 지역주민들이 건축에 동참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농촌현실을 바라보는 목회자의 시각에 변화가 일어났다. 정의운동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측면이 있지만, 농약으로 황폐해진 농촌현실을 바꾸지는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유기농업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생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전제로 안심할 수 있는 먹거리 생산하기, 환경파괴가 인간의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환경을 지키고 인간을 살리기 위한 생명유기농법 실시하기, 농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수입농산물과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전성, 품질, 유통의 단순화를 통한 생활보장을 위해 생산농민, 유통실무자, 소비자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한마음 공동체를 1990년에 조직하게 되었다. 이제는 정의운동과 생명운동과 공동체운동을 함께 하는 총체적 삶의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2000년에 지역폐교를 사들여 지역특화사업으로 환경농업교육장을 만들었다. 자연학교를 열어 천연염색, 도예체험, 곤충 전시, 전통 생활용품 문화체험 등을 돕고 있다. 환경농업교육장과 자연학교는 귀농학교, 창업농업후계인 교육, 친환경농업단체교육, 황토 집짓기 학교 등을 열고 있다. 이처럼 백운교회와 한마음공동체는 안전한 먹을거리(식), 천연염색을 활용한 의복문화 개선(의), 향토색 짙은 주거문화(주), 그리고 평생교육의 장으로서 농촌을 녹색관광지역으로, 흙문화를 비롯한 농촌(생명)문화체험관광으로 제시하며 백년 후의 부활공동체를 꿈꾸며 창조질서를 보전하는 선교공동체이다.

2) 쉴만한 물가 교회와 작은 예수공동체(무의탁노인 생활신앙공동체)

작은 예수공동체는 경증 치매, 중풍, 노환 등의 질병을 앓는 무의탁노인 생활공동체로 1991년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에 손주완 목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논과 밭 1285평을 구입해 공동체 식구들과 함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현재는 논 600평과 밭 1000평에 농사를 짓고 있다. 초기에는 민간시설(조건부신고시설)로 시작했지만 2005년 공동체 건물과 교회를 신축한 후 노인요양시설로서 개인운영 신고시설로 신고하여 5명의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손주완 목사는 상지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를 받아 1급 사회복지사 자격을 갖고 있다. 건물은 요양시설 형태로 짓지 않고 전원 속 펜션 주택과 가정집 형태로 건축하여 수용시설 이미지를 탈피해 ‘집’과 같은 편안함을 주도록 했다. 작은 예수공동체는 노인들과 함께 자율적인 신앙생활을 하며 거동이 가능한 노인들과 농사를 지으며, 재활과 의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동체의 운영원칙으로는 무의탁 노인을 기준으로 공동체에 받아들이며, 다양한 구성원들(남여,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인과 젊은이)이 서로 협조하고, 식구들 스스로 가능한 역할을 분담하며, 신앙생활은 자율에 맡기지만 예배는 출석하게 한다. 유기농 농장으로 연민(聯民)농장을 운영하는데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농사를 짓는데 현재 무 농약 품질 인증으로 오리 쌀, 감자, 고구마, 깨, 콩 등을 생산하며,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어 소규모 직거래를 실시하고 있다. 농사 참여자는 운영자 내외, 적극 참여자 2명과 소극적 참여자 2명 등 모두 6명이다. 농장의 목표는 유기농 농산물을 공급하여 이웃의 생명을 살리고, 공동체의 자립에도 기여하게 하려고 한다. 작은예수공동체는 신앙의 터전으로서 쉴만한 물가 교회와 생명농업의 실천 현장으로서 연민농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손주완 목사는 작은 예수공동체의 의의를 작은 공동체 지향, 신앙공동체 지향, 생명공동체 지향, 농촌공동체 지향 등으로 제시했다.

3) 한벗 교회와 예사랑 공동체(실직ㆍ노숙인 쉼터)

수원 한벗교회에 정충일 목사가 부임한 것은 1995년이었다. 부임하던 해에 누리사랑방이라는 공부방을 개원했고, 연 1회 경로잔치도 시작했다. 1998년부터는 실직ㆍ노숙인 선교와 쉼터를 운영해 왔다. 2000년부터는 탁아소를 시작했다. 한벗교회는 실직ㆍ노숙인 선교를 하면서 쉼터에 입소한 실직ㆍ노숙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예사랑공동체를 이뤄 주 1회 경로당 어르신들에게 점심식사를 대접하고, 수원역 주변에서 노숙한 사람들 30-50명에게 매일 아침식사를 제공하며 상담하고 있다. 자활의지가 있는 실직ㆍ노숙인들은 폐지를 수집하여 자활사업을 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 성남 푸드뱅크와 연결하여 기초생활보호대상자와 생활이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의 야채 나눔을 실시하고 있다. 희망의 쉼터는 상근 근무자가 3명이다. 자활의지를 지닌 실직ㆍ노숙인 3명이 희망의 농장에 기거하면서 개 사육을 자활사업으로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실직ㆍ노숙인들이 다른 실직ㆍ노숙인들과 노인들과 가난한 이웃들과 음식을 나누되 자신들이 모은 폐지나 사육하는 개를 팔아, 그리고 푸드 뱅크의 도움을 받아 시행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예배가 있고, 일부는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4) 다문화 교회와 국경없는 마을(다문화 공동체)

1994년 안산에 서남노회가 설립한 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박천응 목사가 이주노동자선교와 목회를 감당해왔다. 그러나 한국사회 문제(이주노동자 관련 문제)를 저항과 비판의 차원에서만 해결하기 어렵고, 저항, 비판, 상호협력을 통한 대안 만들기가 필요하며, 대안은 문화를 중시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1999년에 제기한 것이 국경없는 마을이다. 국경없는 마을은 이주민인 소수자의 보호, 한국주민들인 다수자의 변화, 그리고 한국주민들과 이주민들이 함께 다문화 공동체 형성을 목표로 하는 대안문화운동이요, 공동체 운동이다. 국경없는 마을 운동의 전제는 문제를 가진 자가 문제 해결의 주체라는 생각, 문화는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에 기존의 차별문화를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축제의 문화로 대체하려고 함, 그리고 ‘나’와 ‘너’의 하나됨, 일체의 정신에서 공존과 상생, 나눔이 가능해진다고 보는 것이다. 다문화교회와 안산이주민센터가 자리한 원곡동의 외국인 비중은 1.3%로 전국 평균 0.6%에 비해 두 배 이상 높다. 1997년 말 경제 위기 이후 영세 중소기업에 이주노동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이러한 인구학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사회적 실천운동으로서 국경 없는 마을은 국제 이주민을 함께 사는 이웃으로 여기는 의식개혁운동,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주민운동, 권력과 돈에 의해 만들어진 차별적 사회구조를 변혁시키려는 사회실천운동이다. 대안운동으로서 국경 없는 마을은 다문화공동체를 열어가는 문화운동, 소수자와 다수자에게 열린 참여민주주의 공동체 지향하는 정치운동, 이주노동자들 자신의 국경 없는 마을 은행과 이주노동자 창업협동조합 등을 통한 경제운동이다. 국경 없는 마을의 형성 내용으로는 주민들의 생활환경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터 가꾸기, 이웃관계를 회복하고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공동체 이루기, 공존하는 공동체형 인간 교육하기이다.

이러한 마을 만들기를 위해 국경 없는 마을 원곡동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다. 국경없는 마을학교를 통해 마을 만들기의 사례 제시와 강의가 이뤄진다. 마을 가상도 만들기를 통해 다문화공동체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며 긍정적 방향으로 만들어 가도록 한다. 원곡동 신문을 통해 국경 없는 마을 만들기에 관한 정보를 나누고 있다. 그 밖에 한국 주민들과 이주민들이 함께 청소하기, 다양한 국경없는 마을 축제, 안산월드컵, 길거리 문화카페, 인권문화교육, 이주노동자와 주민 만남의 밤 등을 실시하고 있다.

4. 비정부기구(NGO) 형태: 마을의 경제를 살리는 기독교 기관

1) 영등포산업선교회 협동조합

영등포산업선교회(이하 영산)는 1965년 조지송 목사가 소비조합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토의한 이래 소비자협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1968년에 실시했고, 타이어 공장을 통한 생산자협동조합도 시도했다. 1969년에 50명 회원이 신용협동조합을 설립 후 1972년 영등포산업개발 신용협동조합으로 우리나라 신용조합 1호로써 재무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유신시대에 대대적 탄압으로 신용협동조합이 1978년에 해체되고 곧 바로 다람쥐회로 명칭을 바꿔 협동운동사업(비인가)을 이어갔다. 그렇지만 1980년대는 모든 운동이 노동운동에 초점을 맞춘 시기여서 다람쥐회의 신용협동조합 사업은 명맥만 유지했다. 1987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탄생하면서 영산에 많이 모이던 노동자들이 빠져 나가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정체상태가 이어졌다. 다람쥐회는 1994년 경제공동체 ‘대안’과 통합한 후 교육프로그램을 강화하면서 자산과 회원의 증가속도가 빨라졌다.

1997년 3월부터 6차례에 걸친 협동학교 교육을 통해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협동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소모임으로 이어졌는데 영산 소모임으로 ‘밝은 공동체’가 모여 자녀와 함께 주말교육프로그램을 했는데 이것이 교육공동체의 모태가 되었다. 1999년에는 주부협동학교 소모임 주부들이 환경과 먹거리에 대한 교육을 계기로 ‘서로살림’생협 준비모임을 만들었다가 2004년 서로살림생활협동조합을 만들었다. 2001년에는 영산회관에서 서울의료생협 발기인 대회를 가졌다. 2002년 대림동에 서울 의료 생협 한의원을 개원했고, 2003년 우리네의원도 개원했으나 2006년에 의료진 공석으로 폐업했다. 2007년에는 우리네치과를 개설했다. 한편 영산이 운영하는 실직ㆍ노숙인 자유이용시설인 햇살보금자리 이용자들이 다람쥐회를 이용하게 한 결과 1년 만에 1억 가까운 돈이 저축되어 고시원 건립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또 남부금속노조와 서울건설일용노조 등 노조단체들과 연대하면서 노조원들이 다람쥐회에 가입해 조합이 활성화되고 있다. 그런데 협동조합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합원의 요구 수렴과 지역적 유대가 중요한데 영산의 협동조합 사업들은 지역적 유대가 적다는 지적을 받아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앞으로의 과제이다.

2) 봉천동 나눔의 집 서울관악자활후견기관

봉천동 성공회 나눔의 집은 1991년 송경용 신부가 개원했다. 이후 공부방, 어머니 한글교실, 청소년 쉼터 등 다양한 빈민선교 활동을 펼치던 중 1996년에 관악자활지원센터의 문을 열었다가 2000년에는 보건복지부에 의해 자활후견기관으로 지정되었다. 1998년에는 위기가족공동체 ‘살림터’를 개원했고, 2000년에는 청소년 쉼터가 장기보호 가족공동체 ‘행복한 우리집’으로 개명했다. 2003년 <함께 사는 세상> 건물이 완공됨에 따라 ‘행복한 우리집’과 ‘살림터’가 <함께 사는 세상>에 합류했다.

빈민선교는 주민조직운동을 중심으로 생산 공동체운동과 신앙공동체운동을 통합시키려 해왔다. 생산 공동체운동으로는 허병섭 목사가 하월곡동에서 건설일용노동자 중심의 일꾼 두레를 운영했고, 상계동 나눔의 집에서 김홍일 신부가 봉제협동생산 공동체인 실과 바늘을 운영했으며, 봉천동 나눔의 집에서 송경용 신부가 건설일용노동자들의 건설협동조합인 나래건설을 운영했다. 그러다가 도시빈민선교 활동가들의 경험을 생산적 복지와 결합시켜 제도화시킨 것이 자활지원센터로 보건복지부는 1996년에 서울관악을 포함해 5개를 시범사업기관으로 지정했다가 2000년에 자활후견기관으로 정식으로 지정했다. 현재는 전국적으로 242개의 자활후견기관이 있다.

자활후견기관은 저소득 주민의 자활자립을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생산/협동/나눔의 이념과 정신을 기반으로 인간의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립의지를 지닌 빈곤층에게 공동체 창업을 지원하며 안정적 고용이 되도록 돕기 위해 민관협력 체제를 갖추고, 급여의 일방적 전달방식을 탈피해 저소득 주민간 유대를 바탕으로 공동체적 사업방식을 모색한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에는 자활공동체 사업으로 (주)나눔 공동체 중심으로 도시락, 출장뷔페, 단체급식을 하고, 한국 클리닝은 청소 및 위생관리용역업을 담당하고, 가사도우미 자활공동체가 있다. 자활근로사업으로는 폐 컴퓨터 수거사업을 통해 환경을 보호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며 사회적 통합에 기여하며, 보ㆍ교육지원 사업을 통해 보육이나 교육시설에 보조교사로 활동하여 지역복지에 기여하고, 복지간병사업을 통해 무료 간병 서비스를 하며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하고, 장애통합지원 사업으로는 장애아동통합교육을 위한 보조원으로 보조교사 취업을 목표로 하며, 재활용매장사업을 통해 환경보호와 일자리 창출과 사회통합에 기여하려 한다.

3) 사회적 기업: 울산동구 사회적 기업추진위원회

2003년부터 시행해온 취업취약계층의 고용을 위한 사회적 일자리 창출 사업은 일회성 생계보조에 그치는 한계가 있다. 지역자활사업의 한계는 자활 성공률이 낮음, 대상이 기초생활 수급자와 차상위층으로 제한되어 경쟁력이 떨어짐, 자활공동체인 경우에도 고용규모가 작아 사업안정성이 적음, 전문적 운영지원체계가 미흡, 장애인, 노인, 실직여성 등을 위한 체계적인 일자리창출 프로그램과 영영별 교류와 협의 시스템의 부재 등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2007년 7월부터 ‘사회적 기업육성법’을 시행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은 취업취약계층의 지속가능한 고용과 지역주민의 삶의 질 관련 사회 서비스 제공을 목표로 한다. 울산동구 사회적기업 추진위원회는 울산 동구 지역자활센터를 중심으로 희망을 나누는 집(기독교 NGO, 김용식 목사), 울산 동구청, 동구 복지포럼, 울산대 사회과학연구소 등으로 구성된 포럼을 통해 2007년 1년간 18차례의 회의와 3차례의 토론회, 그리고 울산지역 사회적 기업 토론회와 3차의 올산시 동구 사회적 기업 토론회, 두 차례의 주민교육을 거치면서 결성되었다. 울산 동구 지역자활센터는 모범적인 민-관-산 협력활동으로 자활사업 평가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었다.

위의 추진위원회는 동구 지역자활센터 자활공동체와 자활근로사업단의 현황을 평가하고, 수익성이 높은 사업과 대기업의 참여도를 미리 조사한 결과 청소 및 위생관리 등 건물관리 영역의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현대중공업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1단계에 지자체 연계형 사회적 기업 추진 후 2단계에 대기업 지역사회 공헌을 결합시키는 단계별 사회적 기업 창업 전략으로 변경했다. 동 추진위원회가 노동부로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게 되면 청소 관련 2개의 자활공동체와 시장형 자활근로사업단 2개를 통합하여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며, 사업안정화가 이뤄지면 사업영역을 점차 확대할 예정이다. 2단계에서는 지역내 장애인, 고령자를 포함한 빈곤근로계층 25명을 추가 고용하여 50명으로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려 한다. 이 단계부터는 연계된 지자체와 협력을 바탕으로 대기업 지역사회공헌과 본격적으로 연계시킬 계획이다.

IV.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

1. 성서적 근거

1) 주의 기도와 마을목회

복음을 선포하는 활동과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려는 활동 사이의 대립,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운동 간 대립을 극복하는 길을 주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다. 바르트는 주의 기도의 처음 세 기도는 십계명의 앞부분 네 기도와 일치하고, 주의 기도의 나머지 세 기도는 십계명의 뒷부분 여섯 계명과 일치한다고 했다. 처음 세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교회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뒤의 세 기도는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명령이다. 루터 소 요리문답은 이들이 두 구획이 아니라 하나의 구획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함께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의 전체로서 두 가지를 위해 기도한다. 이 둘을 하나의 전체로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 위험을 피해야 한다. 첫째 위험은 종교적 환원주의, 신학주의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활동을 예배, 경건, 교리 등의 경직된 종교적 영역에 한정시킨다.”그렇지만 참된 기독교는 “정치적 차원을 포함하여 인간의 삶의 모든 국면을 복음화하기로 되어 있다.”둘째 위험은 정치적 환원주의, 세속주의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의 타당성을 순전히 정치적인 영역에만 국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교회의 사명을 ‘순전히 세상적인 과업의 차원으로 환원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비전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엡1:10)는 것이다. 예수의 이 비전이 주의 기도에 담겨 있다.

주의 기도의 전반부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다루고, 후반부는 일용할 양식, 용서, 시험 등을 다룬다. 주의 기도의 핵심은 일용할 양식을 나누지 않고 죄에 대해 서로 용서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복음전도와 사회봉사를 나누는 데 익숙하지만 주의 기도는 그런 이분법이 하나님 나라에 통하지 않음을 가르친다. 하늘을 향한 기도와 땅을 향한 기도는 하나의 기도이지 두 가지 기도가 아니다. 예수는 이 두 기도를 하나로 통전시켰는데 이것이 주의 기도의 핵심이다.

일용할 양식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마을목회는 세상의 탐욕적인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경제의 대안으로 만나 경제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이주민을 돌보는 희년 경제를 수립하는 것을 지향한다. 특히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받는 이웃과 일용할 양식을 나누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선교기관은 피조물의 청지기로 선한 경제인의 삶을 가정에서, 마을에서 실천해야 한다. 죄 용서와 빚의 탕감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세상에서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노예로 삼거나 죽음으로 몰고 가고, 이로 인해 사회가 해체되어 간다. 이에 반해 주의 기도를 따르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마을에서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에서 화해를 이루는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화해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밥을 나눔으로써 끊어진 인류의 연대를 회복하고 화해된 세상이 열리도록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2014년 9월 성남시는 사단법인 희망살림과 성남시 종교단체협의회, 기업 등과 함께 ‘빚탕감 프로젝트’가를 시작했다. 주의 기도를 마을에서 실천하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겪게 되는 고난과 시험을 이겨나가도록 기도를 지속적으로 드려야 하며, 세상 끝까지 존재하는 악한 구조와 진리를 막는 불의한 자들과의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을 갖도록 악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를 함께 드려야 한다.

2) 안식일, 안식년, 희년과 마을목회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질병으로 신음하고 빈부 차이가 확대되고 가정과 사회가 해체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모두 출애굽 사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 경제는 모두를 위한 풍요로운 살림의 경제를 지향하며, 빈부 차이가 극심한 바로의 경제를 거부한다. 만나 경제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 경제”(출16,18)를 지향한다. 희년 경제는 경제적 격차가 벌어진 사회를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사회적?경제적 구조조정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경제체제로, 정의를 결여한 종교는 거짓 종교임을 가르쳐준다.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만나 경제의 실현이요, 주의 기도는 안식일 경제와 희년 영성의 실천을 촉구한다.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은 개인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희년의 성취요, 하나님의 통치의 체험이다.

안식일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예배드리는 날이다. 성령 안에서의 참 안식을 누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선택하게 된다(마6:24). 이처럼 안식일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선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마을목회를 통해 안식년과 희년을 마을에 성육신(제도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을경제의 구조적 양극화를 극복하여 평등한 마을 경제구조와 마을의 사회구조를 이루는 것이 마을목회의 중요한 과제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생활임금제를 도입하며, 실업자의 취업을 지원하고, 마을의 문화와 상황에 적절한 마을기업들을 일으키는 데 교회와 사회단체들과 지자체가 협력하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3) 성만찬과 마을목회

교회와 마을 주민들과의 나눔은 성만찬을 그 모델로 삼아야 한다. 구약성서에서 하늘나라의 잔치로 이해된 공동식사를 통해 체험한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 이스라엘의 사회법 제정에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했다. 특히 공동식사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할 때 그 의의가 더욱 두드러진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식사가 지닌 종말론적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의 식탁 역시 음식의 나눔을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고, 사람들 사이의 화해를 드러내며, 죄인의 회개와 죄인의 용서 등을 하나님 나라의 맥락에서 해석했다. 교회와 마을 주민들 사이의 나눔과 공동식사/밥상공동체는 가난한 자들을 불러 이 식탁에 초대하여 용서와 화해를 통해 새로운 사회관계를 형성하도록 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교회와 마을 주민들 사이의 나눔과 공동식사는 새로운 마을(대안사회)을 형성하는 입구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병들고 귀신들린 자들, 세리와 죄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심을 통해 예수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부터 소외되었고 배척을 받았다. 그는 그들과의 동일시로 인해 힘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 연약한 자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십자가에서까지 견고히 붙들었다. 교회와 마을 사이의 나눔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끝까지 참고 저들의 변화와 하나님을 기다리며 신뢰하며 끝까지 헌신해야 한다. 이것은 십자가를 지는 길이요, 일종의 순교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눈 그리스도인들은 마을 주민들, 특히 가난한 이웃들과 공동식사를 통해 식탁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마을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사건이 일어나고, 마을이 새롭게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향한 일방적 자선이 아니라 재화의 순환, 나눔으로써 화해가 이뤄지고 상호풍성해지는 길을 찾도록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이런 길을 디아코니아와 깔뱅의 경제이해에서 제시하기로 한다. 물론 이런 길은 쉬운 길이 아니기에 마을과의 성만찬 나눔을 통해 화해를 이루고 마을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의 변화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 끝까지 신뢰하고 참고 기다리며 십자가를 지는 태도를, 일종의 순교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2. 교회의 본질

1) 디아코니아와 마을목회

디아코니아는 주는 자-받는 자 도식의 바알 유형의 디아코니아도 있고, 야웨 유형의 디아코니아가 있다. 나눔에서 받는 자와 주는 자가 고정된 것은 바알 유형의 디아코니아다. 이런 경우 받는 자는 도움을 받는 사람은 주는 자에게 감사할 뿐 아니라 무의식적 적대감을 지닌 내적 장애인이 된다. 반면에 주는 자는 타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주기만 하려는 강한 자가 된다. 이는 기독교 활동가들의 직업적 죄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죄(결함)는 본질적 규정이다. 그 어떤 인간도 남을 도울 수 없는 사람이 없다. 이것이 공동체의 본질이다. 또 주는 자는 주는 행동을 강조함으로써 행동주의에 빠지게 되며, 이신칭의를 부정하게 된다. “주는 일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받는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나누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일 수 있지만 나누는 것은 나 자신이다.” 동료 인간 사이의 호혜적 만남의 경험은 치유 사건을 일으킨다. 디아코니아는 사회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을 연대를 통해 중심으로 이끄는 일이며,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사회정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올바른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 대한 책임과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존중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디아코니아적 사랑이 온정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타자가 자신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할 때,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동역자의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배의 관계를 위장하는 위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디아코니아는 개인 사이의 관계로 그치지 않고 대안공동체 모델을 형성하게 된다. 그 공동체는 집단적 돌봄과 공동체로의 통합을 지향한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디아코니아(교회의 사회봉사)가 일방적으로 주는 자와 받는 자가 고정된 틀이 아니라 주는 일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받음을 체험하고 이웃과 대등한 만남과 호혜적 경험을 통해 상호치유가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마을의 주변부에 있던 이웃을 연대를 통해 마을의 중심으로 이끌고 이를 통해 상호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이웃에 대해 책임지는 사랑과 그의 삶에 대한 존중과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즉 이웃이 어려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지원할 책임이 있지만 그 이웃이 어느 정도 스스로 설 수 있게 되면 그 때는 더 이상 도움이나 지원을 할 것이 아니라 동역자 관계로 전환할 줄 아는 디아코니아적 지혜가 필요하다. 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도움이나 지원의 명분으로 스스로 서려는 이웃의 자립을 막고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게 된다. 이런 문제가 마을만들기에서 주민이 주체가 되는 데 큰 장애요인이다. 마을의 형성은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이웃을 지원하고 그들이 스스로 서서 동역자가 되어 함께 마을의 형성을 위해 노력할 때 성취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는 디아코니아가 개인적 관계에 머물지 않고 집단적 돌봄이 있는 대안적 공동체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디아코니아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디아코니아적 사랑 때문이다(마20:28).

2) 코이노니아와 마을목회

코이노니아는 공동체, 교제, 나눔, 참여, 연대, 헌금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코이노니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화해하게 하시는 현존이 코이노니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일치, 인류의 일치, 피조물의 일치를 원하신다. 먼저 교회가 치유되지 않고서는 세상에 확신을 갖고 치유를 선포할 수 없으며, 교회가 먼저 인종적, 국가적, 민족적 적대감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유와 화해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코이노니아는 선물이면서 동시에 소명이다. 코이노니아는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가운데 주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주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코이노니아를 체험하도록 행동하게 된다. 이런 체험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여러 가지 사회적 장벽을 넘어서도록 부르신다. 코이노니아를 체험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타자를 위협으로 여기지 않고 그들의 다름(신학, 인종, 문화, 언어 등) 속에서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을 이해하도록 격려받는다. 타자를 직면하는 것은 항상 고통스런 과정이며, 도전적이다. 이 때 필요한 자세는 예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우신 것(kenosis)이다. 이러한 자기비움은 우리로 하여금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일으키며, 우리로 하여금 연약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런 연약성은 바로 예수의 연약성과 죽음의 사역에 충실함이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 이웃과의 교제를 이룬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나 집단 사이의 화해를 이룬다. 그리스도는 화해의 모델이며 수호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들을 편들며 정의와 평화를 세우기 위한 고난을 감수해야 한다.

마을만들기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한 가지가 이웃이나 주민으로 불리는 타자(가치관, 세계관, 종교, 계급, 문화, 인종 등)와 어떻게 한 마을을 형성하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서 공동체(마을)의 두 초점은 대안사회, 대안적 가치 뿐 아니라 마을 주민들 사이에 코이노니아(친교, 사귐,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했다.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마을목회에서 마을 주민들의 코이노니아에 기여하기 위해 먼저 교회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코이노니아를 맛보아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코이노니아를 맛본 교회, 그리스도인만이 갈등하고 분열된 마을 주민들의 갈등을 해소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일치로, 마을공동체의 회복을 향해 기여할 수 있다. 이는 교회가 성령의 은혜와 능력 안에 있을 때 일어나는 하나님 나라 사건이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또한 선교과제다. 따라서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이나 주민들의 타자성을 존중하고 용납하면서도 다름을 사회적?경제적 차별로 만든 제도, 법, 조례, 관습 등을 고쳐 마을 안에서 화해가 일어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마을이 형성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런데 타자와의 만남은 매우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렵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케노시스) 십자가를 지는 태도라 했다. 이는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따르는 삶을 살 때 가능해진다. 이렇게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움과 연약성을 느끼지만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라는 연약성 외에 다른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마을만들기를 위해 타자를 수용하고 타자들과 더불어 마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연약함 속에서 코이노니아에 참여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골1:24)는 자들이 된다. 이는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를 이룬 그리스도인들이기에 마을 주민들과의 교제가 가능한 것이다.

3) 선교와 마을목회

선교와 관련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본문은 선교 ‘대위임령’(마28:16-20)이다. 그렇지만 이 본문이 “가라”는 것이 강조되는가 아니면 “제자 삼으라”는 것이 강조되는 가에 따라 두 가지 서로 다른 선교개념이 나온다. 서구의 주요 번역본은 ‘포류텐테스’(πορευθεντε??)를 “Go ye(therefore)!”<(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로 번역함으로써 “제자를 삼는 일”보다 “가는 행위”를 더 강조하는 선교이해가 나타났다. “임무가 아닌 장소가 선교사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버렸다.”그러나 “제자를 삼는 일”을 강조하면 선교는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들을 주님이신 예수께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희랍어 본문에서 ‘포류텐테스’(πορευθεντε??)는 분사이지 명령형 동사가 아니다. 이를 명령형 동사로 번역하는 것은 본문의 의미를 왜곡시킬 위험이 있다. “제자 삼으라”는 것이 명령법 동사이고,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다. “대위임령”은 선교의 출발이 아니라 제자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대 위임령”의 세 가지 용어(제자삼다, 세례주다, 가르치다)는 마태 선교의 본질을 요약한다. 왜 “대위임령”에는 “전파하다”(9번 사용)라는 동사나 “천국복음을 전파하다”(4번 사용)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가? “전파하다”와 “가르치다”를 동의어로 여긴 마가와 달리 마태는 “전파하다”는 외부인에게, “가르치다”는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그런데 “가르치다”는 의미는 비인격적 계명에 순종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예수를 따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구체적 결단을 요구한다. 마태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바른 교리를 재는 척도가 바른 행동임을 강조한다. 예수의 참된 제자들은 열매를 맺도록 도전받는다. 이렇게 열매를 맺는 자들이 의로운 자들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 외식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마태가 바른 행동과 열매 맺음을 강조하는 것은 마태 공동체 안의 상반된 집단들, 성령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과 율법을 중시하는 율법주의자들 모두가 행동보다는 말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제시했다.

“제자 삼음”은 마태의 선교이해에서 중심적이다. 제자는 교회론적 개념이다. “세례주고”와 “가르치고”는 “제자 삼으라”는 말에 예속된다. 선교의 목적은 모든 사람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런 수준으로 올려놓는 것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기대하는 자들이며, 세상의 소금과 빛인 자들이며, 복있는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고난과 선교적 권위를 예수와 공유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지닌 부정적 측면도 있다. 믿음이 적고, 두려워하고, 부활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도 있지만 의심하는 자들도 있다. 즉 제자는 완전한 상태에 도달한 자들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깨어 있어야 하는 자들이다. 구원받는 자와 잃어버린 자의 분리는 심판 날까지 유보된다. 지속적으로 깨어있으라는 요청은 자기만족에 대한 경고와 열정적 선교 사역을 위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므로 선교는 자신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위기의 순간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으로 하는 것이다. 즉 제자들은 경배와 의심, 믿음과 두려움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 속에 서 있다.

선교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정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이다. 여기서 의(δικαιοσυνη)를 번역하는 데 문제가 있다. 영어는 거의 의(righteousness)로 번역하는데 보쉬는 이를 “정의-의”(justice-righteousness)로 번역해야 한다고 했다. “정의-의”의 구성적 차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차원이다. 규범적 차원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경험한 정의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는 그의 백성을 위하는 하나님의 구원활동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반응하려는 노력이다. “정의-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그 다음에는 인간의 의무이다.

마태의 선교이해는 땅 끝까지 ‘가라’는 것보다는 ‘제자삼으라’는 데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고 실천하는 제자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에 근거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됨도 선교의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마을목회에서도 마을에 ‘가서’복음을 전하기에 앞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는 제자들을 양육하고, ‘마을의 소금과 빛’이 되는 교회됨이 중요하다.

호켄다이크에 의하면 선교는 메시야 시대에 가능한 사역으로 선교의 주체는 메시야이고, 선교의 목적은 샬롬(평화, 온전함, 공동체, 조화, 정의)을 이루는 것이다. 그는 종말론적 소망 안에서 선교를 이해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선교 이해는 두 가지 선교 이해를 배제한다. 첫째 선교는 선전(propaganda, 동어반복)이 아니다. 복음을 전함은 복음의 씨를 뿌리되 겸손과 희망 가운데 하는 것이다. 겸손이라 함은 뿌려진 씨앗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희망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그 씨앗에 생기를 주시고 적절한 몸을 주실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전은 자기 자신을 강요(동어반복)하기 때문에 겸손하지 않고, 종말론적 소망도 결여하고 있다. 둘째 선교의 목적은 교회개척이 아니다. 이러한 선교 이해는 교회로부터 교회로 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교이해의 문제는 선교를 교회의 기능으로 이해하는 점이다. 이와 반대로 호켄다이크는 교회를 이 세상에서 샬롬을,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선교의 기능이다. 즉 교회는 샬롬을 선포하고(선교), 샬롬을 살고(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를 통해 샬롬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호켄다이크의 선교이해를 마을목회에 적용해보자.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마을목회에 참여하려면 선교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야 한다. 선교는 마을 주민들을 교회에 데려오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선교적 교회론), 교회/복음의 선전도 아니고, 교회개척이나 교회의 확대가 목적이 아니다. 선교는 마을에 복음/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뿌리되 그 씨앗이 죽고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새 몸으로 자랄 것을 겸손히 소망 중에서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씨앗이 죽는다’는 것은 교회/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의 마을을 향한 뜻을 내려놓고, 마을 주민을 교회로 데려오고 싶은 마음을 부인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씨앗에 새 몸을 입혀 주실 것을 기대하는 종말론적 소망을 갖고 기도를 하는 것이 선교다. 즉 마을목회는 우리와 생각이나 뜻이 다른 주민/기관들과 함께 마을만들기 활동을 하되 그런 활동 속에서 뿌려진 씨앗에 하나님께서 새 몸을 입혀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새 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형태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새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샬롬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마을목회로서의 선교는 영혼구원이나 교회개척이라는 씨앗을 뿌려 그대로 동일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두렵고 연약함 속에서,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우리가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뿌린 씨앗을 통해 하나님께서 ‘새 일’을 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3. 에큐메니칼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근거하여 교회일치와 연합을 통해 인류의 일치와 구원, 피조물의 일치와 구원을 지향하는 운동이다. 그런데 보니노는 사람이 살고 있는 하나님의 피조물인 세상, 오이쿠메네에서 에큐메니칼 운동과 반에큐메니칼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인 오이쿠메네의 핵심 문제는 집안의 살림살이(oikonomia, 경제)라고 보았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권력자들이 세상의 일치를 지향한다면서 자신들의 지배와 민중의 종속을 이뤄냈다. 이러한 체계는 죽음의 체계다. 반면에 참 에큐메니칼 운동은 억압받고 고난받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일으키기 위해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하고 상호지원을 통해 참된 오이쿠메네를 만들려 한다. 에큐메니칼 운동은 성령 안에서 우리들의 회심과 변형을 통해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변형의 수행자로, 복음의 담지자로 보고, 그들과 연대하며 생명의 오이쿠메네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니노가 구별한 두 가지 에큐메니칼 운동 중 한국교회는 어떤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것일까?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교회들은 반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닐까?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하는 교회들 중에도 반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는 교회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질문은 다음에 나오는 기준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일치와 마을만들기

교회일치는 중요하지만 가난한 자들이 억압을 받아 갈등과 투쟁의 상황에 있을 때 교회일치를, 인류의 일치를 어떻게 추구해야 하는가? 인류는 가인의 후예로 강자는 일치의 이름으로 약자를 착취한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억압한다. 교회조차도 이러한 억압에 연루되기도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런 죄와 소외와 거짓된 일치를 극복하고 인류의 일치를 향한 새 길을 여셨다. 따라서 갈등과 투쟁의 상황에서 교회일치와 인류의 일치는 긴장 속에 있는 일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긴장은 부활하신 주님의 재림 시 해결될 것이다. 그 이전까지 교회는 고난을 통해, 십자가의 징표 아래서 일치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WCC 5차 총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협의회적 교제는 교회의 일치를 전제한다고 했다.

그리고 교회일치의 자원은 부활하신 주님을 사도들이 만난 것이고, 오늘날에는 성만찬의 교제 속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주신다고 했다. 교회일치가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하기 때문에 교회 내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바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고, 교회는 다가오는 인류의 일치의 징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는 남녀 모두에게, 모든 나라에, 모든 문화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교회는 특정 이슈에 대한 논란 때문에 때로는 거짓 일치를 위해 침묵해야 할 유혹을 받을 때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WCC가 제시하는 세 가지는 첫째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 둘째 교회는 죄와 타협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율 아래 있어야 한다는 점, 셋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하나님의 용서를 거부하는 배교를 식별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들은 마을의 이슈에 따라 참여하는 교회들, 또는 참여하지 않는 교회들과 갈등이나 분열을 경험할 수 있다. 주님의 재림 전까지 교회일치와 인류의 일치는 긴장 속에 있을 것으로 깨닫고, 고난과 십자가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교회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는 교회내 다양성을 용인하는 것처럼 마을목회를 하면서 다양성을 용납하고 바라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특히 민감하고 논란의 여지가 큰 이슈들에 대해 침묵하지 말고 참여하되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자기 성찰 속에서 주님의 기율 아래 용서받을 수 있는 죄와 배교를 식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들은 참여하지 않는 교회/기관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야 한다. 마을목회에 참여하지 않는 교회들은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표징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가 표징공동체됨을 회복하지 못하면 그 선교는 열매를 맺기 어렵다. 따라서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들을 참여하지 않는 교회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지원하고 도울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교회의 교회됨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많은 것을 배우는 교회가 될 때 우리 한국교회의 선교가 새롭게 될 수 있을 것이다.

2) 하나님의 선교와 마을목회

하나님의 선교는 교회와 세상에서 일어나는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활동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가 선교의 방법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교의 목적이다.

마을목회의 모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이다. III에서 제시한 풀무학교 전 교장인 홍순명 선생은 홍성지역공동체가 “삼위일체에 바탕을 둔 차별 없는 공동체”라고 했다. 톨레도 공의회는 삼위일체의 핵심인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상호내주)에 대해서 삼위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 활동에 있어서 서로 불가분 관계에 있다고 했다. 몰트만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권보다 우선하다면서 하나님의 주권은 밖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 뿐 아니라 안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을 통해 구현된다고 했다. 밖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믿는 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예수의 기도(요17,21).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로 갈라진 공동체의 분열극복(갈3,28), 자기를 내어줌의 경제(행4,32), 그리고 만유의 주로 만유 안에 계심(고전15,28)으로 완성되어 간다. 이러한 밖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은 안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활동에 의존한다.

바꿔 말하면 내적 삼위일체 하나님은 바깥으로 향해 열려 있어 인간과 피조물을 신적 사귐으로 들어오도록 초대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와 형상으로 사회를 개선하고 세우기를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 된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조직을 위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은 교회/기관 안에서의 사귐 뿐 아니라 마을 주민과 피조물의 사귐도 중시하는데 이러한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에 근거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에 근거한 마을의 삶과 활동은 실용적 사고의 일면성을 극복하고, 실천을 행동주의로부터 해방시키며, 지배로 인도하는 거짓 지식을 사귐으로 인도하는 참된 인식으로 대체할 수 있다. 참된 인간공동체와 마을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피조물과 화목된 공동체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을 근거로 하며 거기에 참여하는 공동체이어야 한다. 선교활동은 하나님 나라의 표징공동체라는 존재에 의존하는데 이 존재는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사귐이라는 모델에 기초한다.

III 장에서 제시한 마을목회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마을목회를 하는 교회/기관들은 산업화, 도시화, 신자유주의적 지구자본주의가 초래한 가정을 비롯한 전통적 공동체의 해체와 국가적, 세계적 양극화, 빈곤의 세계화, 여성의 빈곤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회적/전 지구적 배제, 생태계의 파괴 등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들이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들은 교회와 직접 관련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교회가 대중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표징(sign)을 나타내는 공동체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대중의 교회는 대중이 모인다는 조건과 이기주의 때문에 자기를 내어줌이라는 과제가 거부된다. 교회가 인류와 관련해 활동을 하도록 부름 받은 대로 행할 때 교회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의 구원을 도울 수 있다. 바꿔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본 사람들, 표징공동체(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여야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활동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인 것처럼 교회의 선교활동은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공동체일 때만 가능하다.

3) 정의로운 평화와 마을목회

WCC는 “폭력극복10년 2001-2010: 화해와 평화를 추구하는 교회”활동과정에서 얻은 여러 통찰에 근거해서 2010년 킹스턴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땅에는 평화를”이라는 주제로 열린 국제에큐메니칼평화대회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에큐메니칼 부르심”이라는 문서를 채택했다. 이 문서는 10차 총회의 평화 관련 핵심문서였다. 이 문서에 나타난 정의로운 평화는 윤리적 실천에서 근본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준다. 정의로운 전쟁이나 평화주의의 대안으로서 정의로운 평화가 제시되었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뗄 수 없는 짝이다. 하나님의 평화 위에 세워진 신앙공동체만이 가정, 교회, 사회에서, 그리고 전 지구적 수준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구조 안에서 화해와 정의로운 평화의 대행자가 될 수 있다. 정의로운 평화를 실천하는 길의 중심에는 비폭력적 저항이 있다. 비폭력 전략은 시민불복종과 불응의 행위를 포함할 수 있다.

갈등을 변형시키는 것이 평화 만들기의 핵심이다. 갈등을 변형시키는 과정은 폭력을 폭로하고 감춰진 갈등을 드러내는 데서 시작한다. 갈등의 변형은 적대자에게 갈등하는 이익을 공동의 선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세계화로 인해 전 지구적 폭력과 인권 침해가 난무하는 속에서 평화가 이뤄져야 할 곳은 지역사회, 지구, 시장, 사람들 사이이다. 사회경제적 격차가 한 국가 안에서, 국가들 사이에서 점차 확대되는 것은 시장지향적 경제자유화 정책의 효율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며 경제성장을 사회의 최우선적 목표로 삼는 것에 도전하게 한다. 인류 역사는 평화 추구와 갈등의 전환, 법치 등 도덕적 가치를 추구한 것도 보여주지만 그 정반대의 가치인 외국인혐오, 공동체 내 폭력, 증오범죄, 전쟁 범죄, 노예제, 인종학살 등으로 오염된 것도 보여준다.

정의로운 평화는 마을목회를 위해 불의한 정치권력이나 기업 등의 행태에 대해 시민불복종이나 불응의 행위를 통해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길을 제시한다. 또 중요한 것은 마을 안에서 이익을 놓고 갈등하는 집단이 있을 때 이를 공동의 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평화만들기의 핵심이고, 마을에서 교회가 화해자의 역할을 하는 길임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주민, 새터민, 장애인 등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차별을 극복하고 차이를 용납하되 차이를 차별로 제도화되지 않도록 교회는 노력해야 한다.

4) 생명선교와 마을목회

생명선교는 경제정의와 기후정의와 살림의 문화를 통해 생명의 풍성함을 이 당에 이루는 것이다.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교회/기관들은 마을목회의 지향이 정의운동으로부터 생명선교로 전환된 것을 보여준다. 기존의 정의운동으로서의 사회선교는 예언자적 역할을 하면서 민주주의와 선교 프로그램들의 제도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기여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사회선교는 획일성 또는 경직성, 자기정체성의 부족, 목회자 중심적, 남성 중심적, 장년 중심적 운동이라는 한계와 행동주의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산업선교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전제인 자연자원의 무한성과 미래적 진보의 무한성(무한성장)을 비판하지 않았다.

이 무제한 성장 모델 안에 악마가 있어 노동자를 착취하고, 주변부 종속국가들의 저발전과 자연파괴를 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사회운동이 정의운동으로부터 생명운동으로, 생명농업으로, 생명선교로 전환한 데에는 산업사회와 경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세계관의 변화이다. 서구의 기계적 세계관으로부터 아프리카의 생명중심적 세계관으로, 서구의 시간중심적 세계관으로부터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공간중심적 세계관으로, 서구의 발전 패러다임으로부터 여성생태학적 관점으로의 전환이다. 위의 대안적 공동체들은 처음부터 공동체를 지향한 경우(풀무학교와 홍성지역공동체)도 있고, 공동체와 연계된 교회(쉴만한물가교회와 작은예수공동체)로 출발한 경우도 있지만 비정부기구 형태를 제외하면 처음에는 노동선교나 빈민선교나 농민선교로부터 출발하면서 정의운동, 사회선교를 펼치다가 생명선교로, 생명농업으로 전환했다.

선교현장에서 타자(선교대상)와의 만남을 통해 타자들이 선교동역자로 바뀌고 나중에는 선교사/목회자 자신의 선교에 대한 이해를 바꾸면서 생명선교로 전환하고 교회형태로부터 공동체형태나 공동체와 병행하는 교회로 전환했다. 예장 총회는 산업선교 5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방향을 생명선교를 향한 농어촌선교(Urban Rural Mission)로 하기로 결정했다. 마을목회가 지향하는 생명선교는 신자유주의적 지구자본주의라는 죽임의 경제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정보사회 에 내재한 죽임의 문화들을 식별하며, 세계교회협의회가 제시한 아가페 문서들을 비롯한 대안적 경제(지역공동체의 경제, 협동조합, 지역화폐, 프라우트 Progressive Utilization Theory)를 제시하는 살림의 경제와 시장과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정체성을 세우고 대안적 공동체를 세우는 살림의 문화를 제시하는 선교를 가리킨다.

그런데 마을목회가 지향하는 생명선교의 핵심은 경제이다. 오늘날 경제가 중요시 되는 이유는 지구 전체에 미치는 사건들 중에서 가장 결정적 요인이 경제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경제는 획득의 기술로서 집안 살림(가정관리)의 경제와 돈벌이로서의 경제로 양분된다. “가정은 인간들 간의 관계이므로 가정경제의 모든 물질적 측면에 앞서서 성원들 간의 윤리적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반면에 돈벌이로서의 경제(kapelike, 영리적 상업)는 “교묘하게 사람을 속여서 이윤을 남기는 영리적 상업이라는 뜻을 함축하고”있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모든 종류의 이윤을 상대방에 대한 도둑질이라고”비난했다.

그런데 현대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경제에 대한 평가에 역전이 일어났다. 돈벌이로서의 경제가 중심이 될 뿐 아니라 칼 폴라니가 지적한 것처럼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가 사회관계들 속에 들어가 있는 대신에 사회관계들이 경제제도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 허먼 데일리와 신학자 존 캅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 대신에 공동체 안에 사는 인간(person-in- community)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제적 인간은 경제학이 학문적 분야로부터 공동체를 섬기는 사상으로, 돈벌이 경제로부터 가정경제로, 개인주의로부터 공동체 안에 사는 인간으로, 세계주의(cosmopolitanism)로부터 공동체들로 구성된 공동체(지방적, 국가적, 대륙적, 지구적 공동체)로, 물질을 경제의 수단으로만 보는 관점으로부터 인간의 삶에 소중한 생태계로 보는 관점으로의 전환을 요청한다.

성서에서 경제(economy)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미아(oikonomia)에서 왔는데 이는 집(oikos)과 법(nomos)의 합성어다. 오이코노미아는 ‘집의 법 또는 관리’, 또는 인간의 살림살이, 피조물의 살림살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피조세계의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생명과 일 그리고 고난이다. 올바른 경제의 기준은 피조물 공동체의 생명과 미래를 위해 섬기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 의해 지배관계가 제거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오히려 시장을 통해 지배 관계를 만들고 무산자를 사회적으로 종속시킴으로써 거짓으로 드러난다. 또 경제학의 주요 근거인 희소성은 자원의 희소성이 아니라 자원에 대한 접근수단의 부족에 기인한다. 문제는 희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실현 여부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연약한 식구의 생명을 돌보는 경제인, 집안의 가장이요, 머슴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의 의를 펼치는 것으로 무의 권능인 죽음과 투쟁을 벌이는 생명의 경제다. 하나님의 경제는 사회의 찌꺼기 같은 자들을 하나님의 가족 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 마을목회는 생명선교를 통해 죽임의 경제와 싸움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펼침으로써 인간을 살리고 피조물을 살리는 대안적 경제를 실천하려 한다. 유기농업과 전통농법을 통해 안전한 먹거리와 생태계를 지탱하게 하는 농법을 개발하며, 가난한 자들의 자활공동체를 이루려 하며, 생산과 유통과 교육을 통해, 대안적 에너지 사용을 통해 대안적 경제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

5) 에큐메니칼 영성과 마을목회

영성은 “복음에 순종하며 살려는 노력, 제자도”로 이해하기 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려 한다. 영성은 인간의 관계형성 능력으로 우선 초월자의 관계형성이 있고, 다음으로 그로 인해 인간이나 피조물과의 관계로 의식이 확장되되, 영성이 관계 형성인만큼 그 장소가 역사, 특정한 시공간인 점을 부가시키고, 마지막으로 그런 고양된 인식이 그런 시공간을 통해 행동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가리킨다. 생명선교를 펼치기 위해서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 교회/기관에 필요한 것은 안과 밖을 향한 영성이며, 디아코니아적 존재됨이다. 본회퍼는 영성훈련의 목표를 내면적 집중에만 둔 수도원에 반하여 “밖을 향한 봉사를 위한 내면적 집중”에 두었다. 기도와 명상을 통해 물질적 유혹과 정치적 이념적 이데올로기 앞에서 굴하지 않도록 영적 훈련을 시켜 온전한 제자직을 실천하되 이러한 제자직은 교회공동체와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예수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6,24)고 했는데 오늘 기독교인들은 이 둘을 동시에 섬기려는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영성훈련이 중요하다. 그리고 디아코니아에서는 행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 존재가 문제된다는 것을 언급했다. 그러면 이러한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어떻게 어디서 만들어지는가? 말씀과 기도, 예배와 성만찬, 그리고 코이노니아 신앙 공동체 속에서 디아코니아적 존재가 만들어진다. 말씀과 예전, 코이노니아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모든 허물과 좌절과 실패와 상처를 용납하는 자기사랑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의 고난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디아코니아에 따라오는 여러 유혹과 어려움을 십자가를 통해 극복하는 자기부정으로 나아간다. 타자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타자의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의 고난과 좌절, 아픔과 고통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가 자신을 인간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새롭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4. 종교개혁 신학: 깔뱅의 경제 이해(재화, 노동, 임금)와 마을목회

1) 인간과 사회 이해

그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의 특징은 타락한 피조물의 구원은 인간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의 회복, 우주의 회복을 포함한다. 즉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가 이뤄지면 이웃과 피조물과의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 깔뱅의 경제, 사회, 정치, 윤리에 대한 교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인간 본성의 애매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적 윤리(교회)와 법의 윤리(국가)라는 두 영역에서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적 조화와 일치는 죄에 의해 손상되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사회에서 새로운 질서가 성취되지 않는 이유는 교인들의 수가 소수라는 점도 있지만, 사회의 부패가 교회 안에도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작은 세상인 마을의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제대로 이뤄진 것인지를 질문하게 한다. 그리고 그는 물질적 삶과 영적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것이 성서의 가르침임을 깨우쳐줬다. 물질은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요, 하나님의 통치를 미리 보여주는 징표다. 기독교인의 영적 삶은 그의 물질에 대한 태도를 통해 판단된다. 개혁신학은 부를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의 문제로 이해한다. 한국교회가 이분법적 신앙을 지녔다는 지적은 그런 교회들은 이미 맘몬 우상숭배를 하고 있다는 깔뱅의 비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따라서 마을목회는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의 회복, 마을의 회복을 위해 영적 삶과 물질적 삶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2) 재화의 교류

재화나 돈은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로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순환함으로써 어느 정도 소유의 균형을 이루고 불평등을 해소함으로써 하나님의 경제질서를 수립하고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사회적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인류를 하나되게 하는 영적 연대를 이뤄야 한다. 이러한 순환을 방해하는 것이 죄, 이기심, 게으름, 탐욕이다.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돈이 흘러가게 하여 불평등을 해소하도록 하는 것이 마을목회의 주요과제이다. 동시에 양자 사이에 상호의존관계를, 영적 연대를 회복하는 것과 이러한 순환과 관계의 회복을 방해하는 탐욕과 이기심을 극복하게 하는 것도 마을목회의 주요과제이다.

3) 노동과 임금

인간의 본질은 노동이 아니라 안식이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된 안식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적, 해방적 노동을 가능하게 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지 않는 것이 노동의 타락의 시작이고 억압적인 노동이 된다. 교회는 기독교인들에게 영적 교제의 표현인 물질의 순환을 회복시킨다. 물질적 나눔의 행동이 결여된 기독교 영성은 잘못된 것이다. 집사는 영적 교제의 표현인 물질, 재화(헌금)의 순환, 나눔을 위한 직분이다. 당시 제네바는 엄청난 수의 프로테스탄트 난민 때문에 실업문제가 심각했다. 깔뱅은 난민들이 새로운 일자리에 적응하도록 직업교육에 관심을 기울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유급 임시직을 부여했다. 그런데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시의회에 직조산업을 개발할 것을 제안했다. 병원은 환자 이외에도 생계가 막연한 가난한 사람들을 수용하도록 했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해방적이고 창조적이 되도록 하는 것과 영적 교제로서 재화가 부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로 순환하게 하고, 실업자들이 취업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마을목회의 중요한 과제다.

임금은 노동자와 기업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으로 선물로 받는다. 임금의 결정권은 인간에게, 기업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다. 따라서 임금을 부자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난한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절반만 주려는 것은 착취이자, 신성모독이다. 임금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 공평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부자들은 종종 가난한 자들의 임금을 절반으로 깎으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가난한 노동자는 대안이 없기 때문에 빵 한 조각 만 줘도 고용할 수 있다고 부자는 생각한다. 이는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이다. 깔뱅은 노동자들과 고용주들과 정부사이의 논쟁에 개입하여 삼자가 평등한 권리를 갖는 상공조직을 제안하여 삼자에 의해 수용되고 원활한 활동을 통해 파업을 피하여 사회평화가 경제회복과 번영으로 꽃피우게 하는데 기여했다. 마을목회는 마을에서 노동자들(이주노동자 포함)의 임금이 체불되지 않도록 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에 불과하고,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이 남성 비정규직의 임금보다 적은 것을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V. 나가는 말

이상에서 논의된 것들의 주요 결론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마을은 입시지옥과 학교붕괴에 대한 대안교육, 상호호혜, 재분배와 교환 사이에 조화를 이루는 대안 경제, 문화를 통해 정체성을 강화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안문화, 자신과 공동체를 생태적으로 보고 재구성하는 생태마을,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는 생활정치를 지향하며 생활의 필요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웃들의 관계망이다. 마을만들기의 배경은 도시화로 인한 문제들, 지방자치 시대의 도래, 도시정책 패러다임의 전환, 후기근대로의 패러다임 전환 등으로 돌봄과 배려와 배움의 공동체인 마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을만들기를 접근방식에 따라 분류하면 아이와 학교를 살리는 마을, 마을을 살리는 경제(마을회사), 마을을 살리는 문화, 생태마을로의 전환, 마을을 살리는 생활정치, 그리고 통합형이 있다.

마을만들기의 특징은 자발성, 다양성, 개방성, 자족성, 교육의 중요성, 창의성 등이 있다. 마을만들기의 의의는 다양한 사회적, 시대적 문제들에 대한 주민들의 아래로부터의 대응, 대아사회와 대안적 가치를 추구함, 그런 가치 실현을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 마을의 형성과 유지는 마을 주민들 사이의 친밀한 관계, 아래로부터의 자급과 자립을 통한 자기 완결적 마을구조 형성, 마을만들기의 주체가 마을의 ‘보통’사람들임, 마을만들기는 민과 관의 협치, 거버넌스에 의한 것이다. 마을만들기의 과제로는 관 주도를 극복하여 주민이 주체가 되는 것, 경제적 자립 달성,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주의 이해 극복하기, 대안적 가치 중심의 동질집단을 넘어서기 등이다.

마을목회는 목회자가 교회의 교인들을 돌보는 목회를 넘어서서 교회/기독교기관과 그리스도인들이 마을의 주민들과 마을 공동체의 회복과 성장을 위해 다양한 모습-마을을 살리는 학교, 마을기업, 마을을 살리는 문화, 생태마을, 마을을 살리는 생활정치 등- 으로 돌보고 섬겨 하나님의 나라를 마을에 이루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목회를 가리킨다. 마을목회의 사례는 형태에 따라 마을을 살리는 공동체 형태, 마을을 살리는 교회, 소수자들과 함께 마을을 일으키는 교회, 마을의 경제를 살리는 기독교 기관 등이 있다.

마을목회의 성서적 근거는 주의 기도, 안식일, 안식년, 희년과 성만찬이다. 마을목회의 신학적 근거는 교회의 본질로서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선교가 있고, 에큐메니칼 신학으로 일치, 하나님의 선교, 정의로운 평화, 생명선교, 에큐메니칼 영성 등이 있고, 종교개혁신학으로 깔뱅의 경제 이해(재화, 노동, 임금)가 있다. 여기서 주의 기도와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교회가 마을목회에 참여하는 장애물인 이분법과 교회중심의 선교 이해를 극복하는 것을 돕는다. 다른 신학은 마을만들기를 하는 데 교회가 기여할 수 있는 신학적 자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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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의 무단전재를 허용치 않습니다. 부분 인용할 경우 저작권에 유의하고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출처 : <마을목회 신학과 실천>, 오필승 엮음, 예장마을만들기네트워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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