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시대, ‘마을목회와 마을 만들기’

[편집부 알림]

 

▲ 본 논고는 <마을목회연구소>의 제6차 마을목회자학교(2023년 2월 6~7일) 장신대 성석환 교수님의 주제 강의 원고입니다.

▲ 어느덧 마을목회운동 10년을 맞이하여 마을목회운동이 더욱 활발히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모색하기 위해 그동안 <마을목회자학교>와 <마을목회 이야기 한마당>에서 강연되었던 소중한 자료들을 보다 널리 공유하기 위해 정리하여 이곳에 연속하여 올릴 예정입니다.

본 논고의 무단전재를 허용치 않으며, 부분 인용할 경우 저작권에 유의하고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합니다. (출처 : 제6차 마을목회자학교 자료집 (주제 강의:성석환 교수, 마을목회신문 게재:http://www.maeulch.net/news/311518)

 

 

포스트 코로나 엔데믹 시대, ‘마을목회와 마을 만들기’

 

/ 성석환 교수(장신대, 기독교와 문화)

 

코로나 팬데믹이 ‘4차 산업혁명’을 20년 앞당겼다거나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다시 디자인해야 하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인간이 지금처럼 살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한다. ‘코로나19’는 그동안 정상적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을 되돌아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미래의 모습에 대해 깊이 고민하도록 요청하였다. 이제 엔데믹 시대에는 새로운 질서로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정권교체기 혼란도 있었지만, 한국은 ‘코로나19’ 대응에 있어 모범적으로 대처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는 포기했던 총선과 같은 정치 일정도 안전하게 진행되었고, 초기에 마스크 대란이 있었지만, 시민들은 점차 인내하고 협력하면 모두가 좋을 수 있다는 값진 경험을 했다. ‘긴급재난지원금’을 두고 벌인 ‘선택’과 ‘보편’의 논쟁을 통해 엔데믹 시대의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우리가 국가의 방역에 잘 협조한 것을 두고 독재시대에 내면화된 한국인의 굴종적 잔재라 평가하는 서구 일부 평론가들의 비평도 있었다. 이것은 “서구의 근대적 민주주의를 우리의 정치적 공간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21세기의 전환적 시기를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제국주의와 독재를 거치며 주체적인 시민역량을 형성할 기회가 늦었던 한국 사회에, ‘공공성’이라는 의제가 모든 시민의 ‘공정, 공존’의 가치로 전환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한국사회는 ‘코로나19’의 폭풍 가운데에서도 나름의 발전과 진보가 있었지만, 모두에게 좋은 삶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공의 영역이 더욱 강력하게 확장되어야 하고,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기 전에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위해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사회 분열의 원인 중 가장 심각한 정치적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 문제는 팬데믹 기간 중 더욱 심화되었고, 엔데믹 시대에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의 존재적 의미는 선교적이다. 팬데믹 동안 갈등과 분열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던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는 이전에 비해 거의 반 토막이 났다. 권력을 잡은 소수와 부를 독점하는 상위 10%의 행복을 위해 대다수 시민의 삶은 점차 피폐해지고 가난해지는데, ‘사회적 거리 두기’가 풀리자 교회들은 다시 ‘부흥’을 외치며 복음의 회복보다는 현장으로의 복귀, 회귀에 방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엔데믹 시대의 선교적 소명에 대한 새로운 전략이 없다.

 

‘코로나19’, 한국 사회에 ‘뉴 노멀’을 요구하다

 

‘코로나19’ 사태는 각 개인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적절히 절제해야 했었다는 의미에서, 또 정부의 사회적 통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정치 공간을 점유해 온 의제들을 시민의 생활정치적 의제로 전환하는, 비의도적이지만 의미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공정한 사회’, ‘공정한 정치’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는 어느 때보다 확대되었고, 시민들도 참여적 민주주의의 정치적 문법을 체득할 수 있었다.

 

팬데믹 동안 시민 스스로 정치적 문법을 체득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서로의 생존을 타협과 절제와 배려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공존하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면 생존도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 ‘코로나19’에 대처하면서 보여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서로의 생존을 위해 무엇을 양보해야 하고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사회적 행위들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간접적 참여에 비해서 더 진일보한 참여적 생활정치의 일면을 경험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재난 상황에서 특별히 더 위기에 노출되고 희생을 당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런데도 전체적으로 볼 때 ‘국가재난지원금’이 공론화된 것은 그 영향이 일상의 현장에서 즉각적이며 구체적으로 실현된 정책이었다는 점에서 기왕에 제기된 정치적 의제인 ‘공정’의 가치가 일상에서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알게 한 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교회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은 치명적인 실수로 남아 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끼리’ 혹은 ‘친밀한 사이’의 관계성을 중시해왔는데, 지난 팬데믹 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새로운 사회적 문법, 즉 ‘뉴 노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지거나 서로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예의가 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되었다. 사실 우리 사회의 ‘가까움’은 대부분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형성되는 위계질서의 상징이거나 지연, 학연과 같은 연줄의 정치적 혈연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엔데믹 시대에 직면하는 한국 사회는 수많은 갈등구조를 안고 있다. 세대, 성별, 계급을 중심으로 기존의 기득권과 신생하는 시민사회의 세력들이 대결하며 향후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다. 어느 사회나 발전하기 위해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기에 최대한 부작용을 줄이는 것이 과제이겠으나, 정권이 교체되면서 엔데믹 시대 도입부의 한국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럽다.

 

현대 사회의 사회적 분열은 전반적인 불평등 구조에 기인하는데, 팬데믹 동안 이 불평등 구조가 전 지구적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이다. 정치적 갈등과 혼란이 고조되면서, 민생과는 거리가 먼 정략적 정책이 시민의 일상적 고통에 눈을 감고 있는 와중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는 그 결정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국정조사’는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종료되었고, 유가족들의 고통과 절규만이 남았다.

 

청년층의 좌절과 분열상은 한국의 미래에 암울한 전망을 가중시킨다. 한국의 청년들은 ‘돈’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는 것을 각종 통계가 보여주는데, 이를 두고 그들만 탓할 수가 없다. 토마 피케티가 밝혔듯이, 이미 자산의 불평등에서 시작된 청년의 불평등 상황은 소득, 교육, 주거, 일자리, 가정형성 등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각종 청년 정책이 난무하지만, 청년들은 기성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갈등구조에 그대로 편입되어 도구화되고 있다.

 

지난 대선을 거치며 소위 ‘이대남 대 이대녀’의 구도는 세대론을 무기로 자신들의 정치적 이권을 확보하려는 기성 정치인들의 프레임 전쟁이었다는 것이 신진욱(『그런 세대는 없다』)의 주장이었다. 심지어 청년들이 지금 직면한 불평등은,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민주화 세대, 이른바 ‘86 세대’가 구축한 위계적 기득권 체제로 인해 구조적으로 조작된다는 것이 이철승(『불평등의 세대』)의 도발적 고발이다.

 

그동안 특권층, 기득권층 등 소수의 누군가에게만 좋은 것이었다면, 엔데믹 시대의 ‘뉴 노멀’은 청년층과 함께 구성원 모두가 좋아야 하고, 위계나 힘으로 일방적인 소통을 강요해서는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수 없다. 누구나 마스크 한 장을 얻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누구나 감염을 피해갈 수도 없었고, ‘사회적 거리 두기’는 당연한 배려였던 것처럼, 엔데믹 시대의 한국사회의 공공성, 공정에 대한 요구는 더욱 고조될 것이다.

 

엔데믹 시대, 한국교회는 공공성에 응답해야

 

한국교회는 사회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에게는 치명적이다. 신뢰의 사회적 관계망이라 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현저히 약화되는 것인데, 교회공동체가 고백하는 자신들만의 신념과 가치를 사회적 자본으로 전환하여 유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포교이든 변혁이든 더 이상 선교적 기능을 지속할 수 없다.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의 ‘공공성’의 상실이다.

 

하지만 다가오는 미래세대에 복음을 제대로 전하고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기 위해 준비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우리가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기왕에 시작된 한국 사회의 ‘뉴 노멀’에 대한 공론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두에게 좋은 미래가 어떤 모습이며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를 두고 토론해야 한다. 포스트 코로나, 엔데믹 시대에 교회가 분열되고 조각난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어떻게 헌신함으로써 선교적 기능을 회복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팬데믹 기간 중 한국교회는 내부의 혼란을 정돈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로서도 처음 겪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목회적으로 준비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온라인 예배(성만찬)’에 대한 신학적 정당성, 그리고 정부의 행정명령에 대한 대응 방향을 두고 내부적으로 토론하며 갈등하느라 한국 사회의 ‘뉴 노멀’에 대한 고민을 진지하게 공유하고 있지는 못했다. 당장 생존의 기로에 내몰린 교회도 많았으니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엔데믹 시대에 교회가 경제적으로 힘겹고 어려운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 또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켜나가도록 돕는 일에 목회적 역량을 기울여야 하지만, 동시에 한국 사회의 큰 변화의 추세를 목도하고 준비해야 하는 일도 중요한데 이런 역량을 팬데믹 동안 훈련하여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온라인 예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다가 엔데믹에 들어서면서 다시 현장예배만을 강조하는 것은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통계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보다는 일반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청년층은 말할 것도 없고, 3040 세대도 5060과 달리 온라인 접속과 비대면 만남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이다. 엔데믹 시대의 사회적 과제는 오히려 5060 세대에 집중되는 온라인 디지털 불평등(키오스키 사용문제라든지) 격차를 줄이는 것인데, 교회는 전혀 다른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어 세대별 인식차를 좁혀야 한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긍, 부정의 두 측면이 있다. 인간은 편한 것을 좋아하고 익숙해진다는 점에서, 추측하기는 ‘온라인 예배’의 편리함을 맛본 이들 모두를 다시 현장예배로 불러들이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다. 여러 조사에 따르면, 최대치 70% 정도가 다시 현장으로 복귀하는 추세다. ‘온라인 예배’는 신자들에게 선택의 주도권이 주어진다. 예배참석의 선택권, 채널의 선택권, 헌금의 선택권 등이 고스란히 신자들에게 쥐어져서 교회가 기존 방식을 고수하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엔데믹에 당장 교회의 예배나 교제에 예전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는 이들이 많다. 아마도 5060 세대가 주를 이루는 예배와 신앙활동은 예전의 모습을 회복하면서 일견 팬데믹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세대들에서는 이미 다른 문법의 효과가 시작되고 있다. 교회에 대한 헌신과 충성은 이전 세대와 다르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통해 익숙해진 비위계적이며 비대면적 소통방식의 편리함을 알고 있다.

 

위계적인 관계나 일방적인 소통을 부담스러워하는 세대나 어린아이를 가진 성도들은 자연스럽게 ‘온라인 예배’를 통해 얻게 되는 가족끼리의 안락함, 필요할 때 참여할 수 있는 시간적 자유는 큰 장점이다.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교회의 엄숙하고 위계적인 분위기를 이제 불편하게 여기게 될 젊은 층을 교회가 배려해야 한다. 즉 내부적 유연성과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도로서 예배를 드리고 신앙활동에 참여하는 일이 사회와 지역의 일원이 되는 일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 자체로 분열과 갈등의 원인이 된다. 팬데믹 동안 인기 있었던 넷플릭스 드라마 황정민 주연의 ‘수리남’과 엔데믹과 함께 인기를 끌고 있는 송혜교 주연의 ‘더 글로리’에 비친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이기적이며 이중적인데 이런 부정적 인상은 영화의 소재로 자주 활용될 정도로 우리사회에서 무의식적 합의가 이뤄진 상태이다.

 

그러니 교회가 사회의 ‘공동의 선’을 위해 복음의 이름으로 헌신할 새로운 존재 양식을 더욱 고민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공공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선교적으로도 “교회를 다니는 이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들을 위한” 교회로 전환하기 위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하다. ‘온라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든, 현장에서 예배에 참여하든 더 중요한 것은 사회적 고통에 응답하는 복음의 선교적 과제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온라인 교회’를 더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하는 것도 하나의 전략이다. ‘오프라인 교회’는 이미 한국사회의 신뢰를 잃어버린 것이라면 ‘온라인 교회’의 새로운 문법과 선교적 역량을 개발하여 새로운 공동체적 비전을 찾아내야 한다. 엔데믹 시대에는 ‘우리끼리’의 친밀성으로 위장해서 ‘오프라인’의 억압적인 위계를 숨기기 어렵다. ‘공동의 선’이 ‘뉴 노멀’이 되도록 한국교회가 헌신하여 교회의 공적 가치를 의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

 

엔데믹 시대에 교회가 펼쳐야 하는 공동체적 선교전략은 ‘마을 만들기’에 국한하지 않고 ‘온라인 공동체 만들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선교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팬데믹의 신앙경험을 그 자산이자 새로운 에너지로 전환할 긍정적 시각이 필요하다. 다시 현장으로 복귀한다고 해서 이전에 문제시되었던 한국교회의 여러 과제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내면화될 뿐이다.

 

탈교회 종교성과 엔데믹 시대의 도전

 

2021년 팬데믹 기간에 갤럽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비종교인은 이미 60%를 넘었다. 2015년 통계청 조사에서 56%였던 것과 비교하면, 탈종교화의 속도는 앞으로도 계속 빨라질 전망이다. 가나안 교회안 거의 200만을 헤아린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비종교인(unaffiliate)은 타종교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의 경우 가나안 교인은 자신들만의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거나 다시 교회로 복귀하기도 하니 다른 종교성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까지 무속의 영향력이 파고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젊은층이 사주나 팔자를 재미삼아 보는 이들이 늘어난다는 점, 그리고 요가나 명상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 다만 탈종교화라기보다 탈제도권 또는 탈교회 시대라 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기존의 제도권 종교가 의미를 주지 못하자 영적인 갈망이 있는 이들, 즉 사회적으로 결핍을 느끼거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대체 종교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나홀로 볼링’으로 알려진 종교사회학자 로버트 푸트넘(Robert Putnum)은 후속작 ‘아메리칸 그레이스(American Grace)’에서 파편화되고 고립된 미국인의 약화된 공동체성을 회복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 바로 교회의 신앙공동체라고 밝힌 바 있다. ‘기독교와 시민사회’에서 로버트 우쓰나우 역시 작은 공동체교회가 미국 사회의 공동체성 증진에 기여하고 시민사회의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기능을 담당할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교회가 사회적 제도의 하나로 인식되는 것은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익숙치 않다. 지역사회나 이웃을 전도나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에 지역사회의 일원으로서 공동체의 ‘공동의 선’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어색하게 느낄 성도들도 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며, 교회는 선교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파송된 공동체로 인식한다. 그리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한 은혜의 자산은 세상을 위한 공공재로 고백하는 것이 정상이다.

 

특히 팬데믹과 같은 재난적 상황에서 교회는 고통 받는 이를 돕는 것을 넘어 그 고통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모범적으로 방역에 참여했고, 예배도 자발적으로 멈추었으며, 이웃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를 향한 ‘사회적 신뢰’가 낮은 것은, 교회의 공동체적 신앙고백이 아직도 크리스텐돔적 사고에 지배당하고 있고 외부와의 공동체적 유대와 참여를 존재론적 목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영국의 ‘Church Times’의 조사에 따르면, 팬데믹 기간 중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도가 60% 이상 향상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영국 교회가 한 일은 한국교회가 한 일과 거의 비슷하였다. 그럼에도 평가의 결과가 다른 이유는, 주도권을 누가 쥐고 있느냐의 문제였다. 영국 교회는 시민단체와 지역의 풀뿌리 단체와 협력하여 주도권을 그들에게 주었고 교인들과 교회는 그들의 주도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인적, 물적 자원이 되었다.

 

이에 비해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교회의 선한 일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 선전하고 자랑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수요자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자의 관점에서 고안된 돕는 프로그램의 대상으로 다가가는 일이 흔했다. 심지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인색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다른 종교보다 훨씬 많은 재원과 자원을 동원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신뢰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엔데믹 시대의 새로운 교회의 존재 양식으로서 ‘마을 만들기’는 한 가능성이자 가장 적절한 선교적 전략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엔데믹 시대에 ‘마을 만들기’가 이전의 오프라인 그것과 동일하게 전개된다면 효과적일지 의문이다. ‘마을 만들기’는 복음 증언을 위한 선교전략의 하나이고, 지역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하나의 프로그램이며, 주민자치의 정치적 결사에 참여하는 한 실천으로서 그 다양한 함의를 파악해야 한다.

 

‘마을 만들기’의 신학적 정향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전에 수행되었던 ‘마을 만들기’와 유관한 사회적 제도나 지원들이 줄어들거나 사라지고 있다. 정략적으로 전 정권 흔적 지우기 전략인 부분도 없지 않겠으나, 비판적 관점에서 재조정되어야 할 방만한 지점들이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내부적 역량과 훈련은 부족하면서, 목회자 1인 리더십에 의존하여 정치권에 줄을 대거나 몇몇 세력이 합세하여 기독교 대표를 자처하며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권력과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등의 행태는 ‘마을 만들기’ 본연의 목적보다 영향력을 확보하여 정부의 자금을 동원하겠다는 속셈이다.

 

팬데믹 기간에 고조된 시민정치와 참여의 공론화 열기에 기대어 공정과 공공성의 요구를 깊이 인식하는 것과 힘과 권력과 돈을 챙기기 위해 기웃거리는 행태는 구분되어야 한다. 자신들만이 독점하는 정치적 세력과의 유대관계를 활용하여 이권을 노리는 것을 마치 ‘마을 만들기’인양 자랑하며 선전하던 이들이 그동안 방만하게 운영하며 기득권을 누리던 것을 비판적으로 반성해야 한다.

 

교회에서 실행하는 ‘마을 만들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는 약점들이 있다. 정부의 재원을 동원하는 거 자체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의 ‘마을 만들기’는 근본적으로 선교적 과제이다. 지역주민들을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인들을 주민의 정체성을 공유하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신앙공동체는 지역에 파송된 선교적 공동체라는 신학적 선언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마을 만들기’이든 교회의 그것이든 모두 우선 필요한 것은 자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물적 토대가 부족한 상황에서 자체의 역량 강화가 불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해외의 모범적인 사례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한 이들의 연대와 유대를 토대로 일어선 것이 ‘마을 공동체’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민단체에서 유력했던 한 인물이 정치와 관치에 참여하면서 유관한 조직들이 제도권으로 편입되어 공적 자금과 깊이 연계되었다.

 

지역의 풀뿌리 자치조직들이 중간조직으로 동원되면서 정작 지역에 남아 자체역량을 강화하고 지역 자산화의 중심이 되어야 할 인재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되고, 관이 직접 개입하면서 정부 재원을 중심으로 지역조직이 재편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되면 지역의 인적 자산이 공무원 조직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결국 지역사회의 자체적 역량이 성장하기보다 프로그램이나 성과에 따른 임시조직이나 프로젝트 조직만이 남게 된다.

 

‘마을 만들기’의 핵심은 구성원의 자체역량 강화이며, 지역 자산화를 통해 지역사회의 자립자족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정부나 관은 자생적 역량을 갖춘 단위들을 간접 지원함으로써 본연의 지역자치역량을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지역공동체의 주체들이 연대하여 관/정부와 대등하게 협상하여 정당한 재정지원을 요청하고, 더 큰 단위의 국가경제구조의 민주적 발전과 변화를 위한 협력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 거시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신학적 차원에서 ‘마을 만들기’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한 표현이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의 경영과 경세(oicumene)를 표현하는 인간의 헌신과 참여는 세상을 품는 보편적 사랑의 복음에 대한 배제적 혹은 포용적 제도로 표현되어왔다. 성육신 사건은 모든 피조물을 품는 창조주의 사랑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제도화된 교회는 늘 자신들을 구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제도 안에서 확인하려 하면서 타자와 다른 공동체의 배제와 소외를 정당화해왔다.

 

‘마을 만들기’ 선교는 20세기 교회론이 반복한 ‘구획 짓기’ ‘구별하기’의 배제의 논리에 갇힌 복음의 해방적 선언을 지역을 품는 교회론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마을 만들기’는 서구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초국가적 기업자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켜내기 위한 자립자족의 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적 경제’ 운동과 그 궤를 같이하며 성장해왔다. 이 운동은 ‘공유’, ‘공생’, ‘공영’의 사회혁신 운동과도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중교회 운동이 과거에 있었는데, 이 운동에 헌신해 온 이들이 오늘 ‘마을 만들기’에 합류하여 참여하고 있지만, 엄연히 그 상황적 조건은 다르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다원적 시민사회의 성숙도에 따라 주민자치제가 실행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과거 독재정권과 대치하며 지역을 계몽의 대상으로 삼거나 이데올로기적 저항운동의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넘어선다.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문화사회로서 모두의 행복을 지향한다.

 

20세기의 민중운동에서 비롯된 ‘마을 만들기’와 달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마을 만들기’ 선교는 교회가 지역의 중심이 아니라 일원이 되는 전환점에 서 있다. 목회자 한 사람의 신념과 신학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이자 성도인 자신들 스스로 거주공간과 공동체적 삶에 대한 비전을 성서에서 발견하고 공론장을 구성하며 지역주민자치를 실행해 나가는 동력을 얻는 일이다. 그러므로 ‘마을 만들기’ 선교는 종교개혁적 전통에서 진정한 만인사제론의 실천이다.

 

90년대 중후반 북미에서 시작된 ‘선교적 교회(Missional Church)’ 운동이나 거의 동일한 시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선교형 교회(Mission Shaped Church)’ 개척운동의 핵심적 실천 프로그램이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교회 모델이었다. 교회 중심의 선교전략을 내려놓고 지역사회의 필요와 구성원들의 고통에 응답하는 파송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교인 만들기’가 아니라 ‘마을 만들기’ 자체가 선교적 목적이 된다.

 

이런 패러다임 전환은 엔데믹 시대의 ‘마을 만들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팬데믹 동안에 파편화되고 고립된 이웃들, 더욱 심화된 불평등 지수, SNS로 연결되어 있으나 인격적 만남은 어려워진 사람들의 관계망, 분열되고 쪼개져 갈등하고 다투는 정치적 결사들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마을 만들기’는 팬데믹 기간에 무너진 교회 중심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사라져버린 주민자치의 동력을 회복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전환은 팬데믹 기간에 경험한 새로운 공존의 방식에서 단초를 얻을 수 있다. 서방교회의 위계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동방교회의 관계적 삼위일체 모형이 신자들의 삶을 더 정의롭게 이끄는 프로그램이라 본 몰트만의 착상에 기대어 볼 때, ‘코로나19’로 인해 겪는 일반 성도들의 새로운 신앙 경험이 독점적 공간과 시간을 점유하는 기존의 오프라인 신앙형태를 보다 유연하고 비위계적으로 전환할 온라인적 계기가 되도록 할 유도전략이 필요하다.

 

‘마을 만들기’와 ‘공동의 선’

 

당분간 기존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강력한 반동적 결속 에너지가 작동할 가능성도 있지만, 특히 젊은 세대들이 겪은 코로나 상황에서의 신앙적 경험은 그 종교성 혹은 영성에 있어 새로운 양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 핵심적 가치는 역시 ‘공동의 선’ 내지는 우리 사회의 보편적 정치적 문법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농후한 ‘공정, 공유, 공공성’ 등이 될 것이다. 만약 한국교회가 이 도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두 가지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동안 극복의 대상이었던 물질적 번영주의와 성공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비접촉식 소규모, 저비용으로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비의도적이지만 결정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다. 또 하나는 그간 정치적 공간에서 불화를 겪던 한국교회가, 이제 한국 사회의 새로운 공존의 문법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의 유입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지금까지 유지해 온 보수 일변도의 정치적 성향을 교정하고 새로운 영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공론화를 더 쉽게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마을 만들기’가 특정한 조직의 전유물이거나 다른 이들보다 더 우월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하는 목회라거나 전통교회와는 다르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잘못된 전략이다. 팬데믹 기간 중 어려움을 겪은 작은 교회들은 당장의 재정적 압박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작은 교회들마저 기성교회들처럼 기존의 교회중심적 영성을 더 강화하는 동력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더 고립되어 도태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들이 ‘마을 만들기’를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접근가능로를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저비용 고효율의 선교적 교회의 새로운 존재양식인 ‘온라인 교회’나 ‘마을 만들기’ 목회 혹은 ‘온라인 마을 만들기’로 전환하여 엔데믹 시대 지역에서 요구되는 공공성을 확보함으로써 젊은 세대들의 유입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게 해야 한다. 마을목회가 아닌 목회가 없었겠으나, 유지비용을 현저히 줄이고 지역사회와 함께 공존하는 생활목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엔데믹 시대 ‘마을 만들기’에 가장 중요한 가치는 ‘공동의 선(the Common Good)’이 되어야 한다. 최근 회자되는 이 단어는 심각해진 불평등 사회를 극복하기 위해 마이클 샌델, 노암 촘스키 등 정치철학자들이 적극 제안하는 중요 개념이지만, 그리스 민주주의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철학적 가치이기도 했다. 신학은 아퀴나스에 와서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고, 칼뱅에 이르기까지 일반은총을 고백하는 신학적 개념과 통합하여 설명되었다.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은 정치신학이나 해방신학과 다른 방법론을 가진다. 공공신학은 비신학적 자료를 자료로 삼아 대화하고,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발생하는 공공의 의제를 해결하려는 토론에 참여하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기독교의 입장을 개진한다. ‘공동의 선’은 공공신학이 공론장에서 지향하는 성서적 가치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신학적 관점, 교회의 입장을 중심으로 논의하지 않고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앞서 엔데믹의 ‘마을 만들기’는 ‘민중목회’와 다른 시대적 요청과 맥락을 가진다. 시민사회/지역사회에서 공동체적 가치를 정책과 공론화에 녹여내기 위해 조정과 화해, 협력과 참여를 실천하는 공동체 운동이다. 원탁에 앉아 논의하기 위해서 ‘마을 만들기’는 모든 사람이 만족하고 동의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에 신학적 입장만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비신앙인들과 동일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의제를 논의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공동의 선’에 대한 학자들의 정의 중 지금까지 정리된 내용 중 핵심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번영할 수 있는 조건”을 성취하는 것이다. 엔데믹 시대, 불평등과 고립과 불공정이 확대된 팬데믹의 고통과 갈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조건인 뉴 노멀로서의 ‘공동의 선’의 가치를 지역사회에서 실천하는 것이 곧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할 ‘마을 만들기’ 선교와 목회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거듭 밝히지만, ‘온라인 교회’는 단순히 오프라인 교회의 송출이거나 영상서비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뉴 노멀’의 공존, 공유, 공정의 새로운 질서를 담아내는 형식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기성교회는 엔데믹 글로벌 시대에 ‘온라인 마을 만들기’ 즉 ‘온라인 신앙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지원하는 다양한 시도를 모험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청년과 젊은 세대 성도들이 교회에 ‘마을 만들기’에 참여하는 중요한 채널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을 만들기’는 지리적이거나 행정적인 한계에 갇혀 있지 않는다. 엔데믹 시대에 ‘마을 만들기’는 세대와 이념과 성별이 다른 이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더 공정하고 자율적이며 독자적인 선택과 판단을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서로 의존하고 연대하는 온/오프 라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방식,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주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곧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표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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