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주] 1950년대 목민 고영근 목사님의 목민목회 곧 ‘마을목회’ 관련 상세한 증언과 기록들을 본지에 게재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또 소중한 기록물을 작성하여 보내주신 고성휘 교수님(목민연구소,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고영근 목사님의 따님)께 독자들과 함께 감사드린다. 이 놀랍고 감격스런 고영근 목사님의 마을목회 현장 중계가 오늘 마을목회 후배들인 우리에게 크나큰 용기와 각성을 줄 것으로 믿는다. 사실 지난 1백30년의 한국교회 역사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세워진 교회들을 이름없이 빛도 없이 이렇게 섬긴 수많은 마을목회 선진들이 있었음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발굴하여 이제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실천함으로써 선진들의 발자취를 따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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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牧民)목회와 마을목회 02
/ 고성휘 (목민연구소,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앞선 글>
Ⅰ. 개별자에 대한 존중, 목민(牧民)
Ⅱ. 목민목회의 실천; 갈담리 교회 1
1. 무너진 마을공동체의 회복
갈담리 강진교회는 1922년 12월 미국 남장로회 소속 윈(Winn Samuel Dwight ; 위인사) 선교사가 김석조 장로를 파송하여 개척된 교회이다.1) 1934년 5월, 갈담리 산 300번지를 매입하여 성도들의 헌금으로 목조건물 8칸 한 채를 건축하였다. 일제 강점기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해 신사참배를 강요당하자 1939년 9월 윈 선교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하였고 교회는 폐쇄되었다.
1941년 교회종을 약탈당하고 교회가 창고로 사용되면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해방 이후, 1949년 9월 일제 강점기 때 철거당한 교회를 다시 8칸으로 재건하고 1950년 5월 헌당식을 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예배가 중단되기에 이른다.
한국전쟁을 통과하면서 장년이 25명으로 줄고 교회 건물은 기울어져 무너질 위기에 있는 황폐한 교회가 되어버렸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마을 곳곳을 피폐하게 만들었는데 갈담리 교회 역시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교회 내부의 윤리적 문제들까지 발생하면서 교회는 자기생존 능력을 잃어버렸다.
갈담리 지역 자체에 만연한 무기력함은 전쟁이 마을공동체를 어떻게 와해시켰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무너진 폐허의 땅에 상호질시와 무기력함은 절멸된 공동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2) 고영근이 갈담리로 첫 발을 들였던 때는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한지 7년 후인 1958년인데도 갈담리 주민들은 무기력함으로 술과 놀음에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고 있었다.
갈담리는 소설 남부군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곳이다. 좌측으로는 빨치산의 전북도당 유격사령부가 있었던 회문산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1949. 12~ 1949. 3월 좌익운동가 학살사건, 1950년 보도연맹과 요시찰인 학살사건, 1950년 9월 인민군의 우익인사 학살사건 등 4~6차례에 걸친 학살사건이 있었다. 또 우측으로는 부흥광산 폐금광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다.
공식적인 기록은 피학살자 수가 370여명이라고 하지만 유가족들의 주장으로는 700여 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폐금광 학살사건 과정에서 군경은 한 마을의 주민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한 마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가족들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 속에 묻어야 했던 마을 주민들에게는 때로는 자학으로 때로는 상호질시로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는 마을공동체를 살리는 일과 갈담리 교회 사역을 하나로 묶어 공동의 활동을 해 나갔다. 마을 어른들에게는 술과 놀음을 멀리하고 근면을 가르쳤고, ‘나 한사람의 존재의 가치’3)가 얼마나 소중한지, ‘소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면서 쇠약해진 교인들의 심령을 위로하고 하나님은 다수보다 질과 중심을 보시며 소수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였다.
[1. 인생들이 생각하는 다수자 요구; 소수와 다수의 싸움(다수 가결제), 다수가 정의인 줄 안다, 다수가 힘인 줄만 안다.
2. 소수에게 축복하는 역사; 하나님은 다수보다 질과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구원의 길은 소수라 하기에, 다윗인생을 통하여 엘리야를 통하여 적은 무리에게 격려하신 예수님
3. 소수를 축복하시는 약속; 2-3인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集하하는 곳에 주 계신다, 생명길로 가는 자가 적다고 하셨다, 小를 택해 多를 이루고 의인을 보호하시며 貧과 弱을 택하신 주님. 소수는 더욱 용기를 내어라. 다수를 따름은 육신에 속한 것이다. 신앙에는 고독이 없으며 참되게 사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4)
한국전쟁 이후 빈번한 학살을 경험하면서 흉흉해진 사회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던 주민들, 한 마을 안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어느 누구하나 자신 있게 삶을 주인 되게 살아가지 못하는 마을에 그는 ‘나 한 사람 존재의 가치’를, ‘작은 자를 택해 큰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택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욱 용기를 내라’고 강조하면서 갈담리 뿐 아니라 수동, 성수, 주천 등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피폐해진 심령을 영적으로 돌보았다.
무기력해진 주민들에게 무기력과 싸우는 자가 곧 자기 자신임을 설득하고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으며 이 어두운 삶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음을 존재의 가치로 역설하였다. ‘소수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복음은 좌절당한 주민에게 희망이 되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가 없는 수동, 성수, 주천 인근 마을의 성도들에게 영적 힘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마을을 정화하고 순회하며 술과 놀음에 찌든 마을 사람들을 때로는 다그치고 때로는 독려하며 마을을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5시에 나가서 밤 10시에 들어오시고…파출소 가서 순경들이 화투를 하는 걸 책상을 두드리면서 본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되냐 하면서 야단치고…파출소 소장도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면장도 어려워하고 갑자기 학교를 찾아가면 교사들도 화투를 치고 있더래.
그래서 아버지한테 기관 기관마다 돌아가면서 혼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사랑방에 사람들 많이 모이면 새끼줄도 같이 꼬고 복음전도하고…갑자기 들어 닥치는 고 전도사 땜에 다들 깜짝깜짝 놀랬대..5)
그리고 어떻게 부지런하시던가 막 새벽기도 탁 마치면 뺑 돌아서 탁~~혼자 오셨자녀? 착~~전도를 하셔. 한 번 어떤 집이던 들어가면 기어코 끌어내셔. 그리고 그 양반 바른 말씀을 하시자녀? 그 때도 바른 말씀을 잘 하셨어. 전도하고 집집마다 봉사하시고…모를 손으로 심었으니 모도 심고 어려운 할머니들 도와주시고…그랬었지.]6) (계속)
==== 각주
1) 대한예수교장로회 강진교회 교회연혁, 2. (미발행 문서, 강진교회 내부에서 보관해 온 연혁)
2) 김옥선, “거대한 국가의 절멸된 공동체, 그리고 홀로 선 개인들” 「한국문학논총」 77권, 2017, 328.
3) 고영근 자필기록문, 「설교집 1」 1958. 4. 20 설교문, 18.
4) “적은 무리에게 주는 주님의 은사”, 「설교집 5」 1959. 9. 20 설교문, 45.
5) 한완수 사모의 인터뷰 중에서 3. (위의 책, 19)
6) 강진교회 박00집사의 인터뷰 중에서 1. 2015. 7. 2. 오후 2시, (『민중을 위하여 2』, 19)
갈담리 강진교회의 역사적 배경은 교회의 황폐화와 마을 공동체의 와해라는 이중적인 위기 속에서 ‘목민목회: 마을공동체 회복’이라는 사역의 절실한 필요성을 제공합니다.
제공된 소스에 따르면, 갈담리 강진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그에 따른 마을의 사회적 상황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목민목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갈담리 교회의 역사적 시련과 황폐화
갈담리 강진교회는 1922년 12월에 미국 남장로회 소속 윈 사무엘 드와이트(Winn Samuel Dwight; 위인사) 선교사가 김석조 장로를 파송하여 개척되었습니다. 1934년 5월에는 땅을 매입하고 성도들의 헌금으로 목조건물 8칸 한 채를 건축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며 교회는 심각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 일제 강점기 폐쇄: 1939년 9월, 황국신민화 정책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가 있었고, 윈 선교사는 이를 거부하여 미국으로 추방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는 폐쇄되었고, 1941년에는 교회 종을 약탈당하고 건물이 창고로 사용되면서 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 한국전쟁으로 인한 재중단: 해방 후 1949년 9월에 교회를 8칸으로 재건하고 1950년 5월에 헌당식을 가졌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예배가 중단되었습니다.
- 전쟁 후 자기생존 능력 상실: 한국전쟁을 통과한 후 교회는 황폐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장년 성도는 25명으로 줄었고, 교회 건물은 기울어져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갈담리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교회 내부의 윤리적 문제들까지 발생하면서 스스로 생존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2. 마을 공동체의 와해와 무기력 (목민목회의 배경)
갈담리 지역 자체의 피폐함은 교회의 황폐화와 병행하여 마을 공동체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보여줍니다. 전쟁은 한반도 마을 곳곳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갈담리 지역은 절멸된 공동체라고 불릴 정도로 상호질시와 무기력함이 만연했습니다.
- 학살과 트라우마: 갈담리는 소설 <남부군>의 공간적 배경이 될 정도로 한국전쟁 전후 좌익과 우익 세력에 의한 학살사건이 4~6차례에 걸쳐 빈번하게 발생한 곳입니다. 특히 좌측에는 빨치산 유격사령부가 있던 회문산이 위치했으며, 우측에는 부흥광산 폐금광 대규모 민간인 학살사건이 있었습니다. 공식 기록상 370여 명, 유가족 주장으로는 700여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존: 폐금광 학살사건 과정에서 군경은 한 마을 주민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대립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마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했고, 이는 자학이나 상호질시로 이어져 삶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 만연한 무기력함: 학살을 경험하면서 흉흉해진 사회 분위기에 주민들은 위축되었고, 어느 누구 하나 자신 있게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고영근 목사가 1958년에 갈담리에 첫발을 들였을 때에도 주민들은 무기력함으로 인해 술과 놀음으로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3. 목민목회: 마을공동체 회복을 위한 대응
갈담리 교회의 목민목회는 이처럼 교회가 무너지고 마을이 절멸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었습니다. 목민목회는 마을공동체를 살리는 일과 교회 사역을 하나로 묶어 공동의 활동을 해나갔습니다.
영적 회복과 소망 제시: 목회자는 마을 주민들이 겪는 트라우마와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영적인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선포했습니다.
- 목회자는 주민들에게 **’나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강조하며 쇠약해진 교인들의 심령을 위로했습니다.
- 무엇보다 주민들의 좌절감을 해소하기 위해 **’소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총/축복’**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수보다 질과 중심을 보시며 소수를 축복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이 복음은 좌절당한 주민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 목회자는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택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용기를 내라고 역설했으며, 무기력함과 싸우는 자가 곧 자기 자신이며, 자기 자신만이 하나님을 보고 이 어두운 삶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음을 존재의 가치로 설득했습니다.
실천적 공동체 정화: 무너진 공동체 윤리를 회복하기 위한 실천적 노력도 병행되었습니다.
- 마을 어른들에게 술과 놀음을 멀리하고 근면을 가르쳤습니다.
- 목회자는 술과 놀음에 찌든 마을 사람들을 다그치고 독려하며 마을을 정화하고 순회했습니다.
- 심지어 파출소나 학교 등 기관을 갑자기 찾아가 화투를 치는 순경이나 교사들을 야단치며, 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타락해서는 안 됨을 강조했습니다. 파출소장이나 면장도 그를 어려워했습니다.
- 그는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새끼줄을 같이 꼬거나, 모를 손으로 심거나, 어려운 할머니들을 도와주는 등 집집마다 봉사하며 근면한 삶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결론적으로, 갈담리 교회의 목민목회는 단지 교회의 부흥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일제와 전쟁을 거치며 건물과 신앙이 파괴되고, 학살과 상호질시 속에서 무기력에 빠져버린 마을공동체의 회복이라는 절실한 역사적 요구에 응답한 사역이었습니다. 이는 영적인 위로(소수에게 내리시는 축복)와 윤리적 개혁(술과 놀음 금지 및 근면 강조)을 결합하여,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나 한 사람’의 가치를 되찾게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러한 목민목회의 맥락은 폐허가 된 마을에 새로운 씨앗을 뿌려 다시 공동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농사와 같습니다. 땅이 황폐했기에 더욱 근본적인 경작과 씨앗(복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