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누가복음 15장 11절 – 32절 (개역개정)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내 유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니 아버지가 그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더니 (13) 그가 여러 날 후에 그 모든 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으며 (14) 그가 다 쓴 후에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어 환난을 겪게 되매 (15) 이에 가서 그 지방 한 밭 주인에게 품꾼으로 가서 그 집에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가 먹는 콩열매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하였으나 주는 자가 없더라 (17) 이에 자기 자신을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많은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느니라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나를 품꾼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먼 데서 그를 보고 긍휼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거늘 (22)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 먹자 하니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오매 (26) 춤추며 노는 소리를 듣고 종을 불러 무슨 일이냐 물은대 (27) 그 종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맞이하니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지 아니하려 하매 아버지가 나와 권하니 (29) 그가 아버지께 대답하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으되 (30) 한 번도 염소 새끼를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겁게 하지 아니하였거늘 이 네 동생이 와서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킨 자와 더불어 먹으니이다 하니 (31) 아버지가 그에게 이르되 얘야, 너는 항상 내 것과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라 (32)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 시간의 상실과 회복의 갈망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관계를 잃어버리기도 하며,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상실은 시간의 상실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고, 잘못 사용한 시간은 다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방대한 소설을 통해 기억과 시간의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과거의 시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있으며, 특정한 경험을 통해 되살아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깊은 차원에서 잃어버린 시간의 회복을 말합니다. 단순히 과거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시간의 회복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는 바로 이 잃어버린 시간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는 단순히 한 젊은이의 방탕한 생활과 귀향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실존의 근본적 문제, 곧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삶의 허무함과 그 회복의 가능성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2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듣고자 하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교제하시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이었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은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계시하십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세 비유는 모두 잃어버린 것을 찾는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는 가장 길고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인간의 타락과 회복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세 명의 주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아버지, 작은아들, 그리고 큰아들입니다. 각 인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측면을 대표합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작은아들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모습을, 큰아들은 율법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 각자가 어떻게 시간을 잃어버렸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시간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그 간절한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성경 본문 해석: 탕자 비유의 신학적 의미
1) 시대적·역사적 배경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비유가 선포된 시대는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유대 사회였으며, 당시 유대인들은 복잡한 사회적·종교적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첫째, 유산 상속과 관련된 당시의 법적 관습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따르면, 장자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의 몫을 받았습니다. 만약 두 아들이 있다면, 장자는 전체 재산의 2/3를, 차자는 1/3을 받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산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분배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있는 동안 유산을 요구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이었으며, 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둘째, 당시 중동 사회의 가족 체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강력한 가부장적 사회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절대적 권위자였으며, 자녀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특히 유대 사회에서 가족의 명예는 매우 중요한 가치였습니다. 한 가족 구성원의 행동은 전체 가족의 명예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아버지께 유산을 요구하고 떠나는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 결정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수치를 가져오는 행위였습니다.
셋째, ‘먼 나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작은아들이 떠난 ‘먼 나라'(χώρα μακρά, 코라 마크라)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먼 곳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관점에서 ‘먼 나라’는 이방 땅, 곧 하나님의 율법이 지켜지지 않는 부정한 땅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돼지를 치는 일은 유대인에게 가장 부정한 직업 중 하나였습니다. 레위기 11장 7절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돼지를 키우거나 그 고기를 먹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습니다. 따라서 작은아들이 돼지를 치게 된 것은 그가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상징합니다.
넷째,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은 농경 사회였으며, 토지는 가문의 생존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이 받은 유산은 아마도 토지의 형태였을 것이며, 그것을 현금화한다는 것은 가문의 영원한 기업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본문에서 언급된 ‘흉년'(λιμός, 리모스)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자주 발생했던 자연재해였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1세기에 여러 차례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으며, 이는 많은 사람들을 극심한 빈곤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다섯째, 바리새인들의 신학적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대상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자신들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했으며,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과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에서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들이었으며,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 당연하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시는 것은 그들의 신학적 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때, 우리는 탕자 비유의 충격적 성격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식을 뒤엎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계시하셨습니다. 아들의 무례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유산을 나누어주는 아버지, 돌아온 탕자를 뛰어가 맞이하는 아버지, 그리고 죄인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모습은 당시 청중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2) 본문의 구조와 신학적 의미
탕자 비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작은아들의 타락과 귀향(11-24절), 둘째는 큰아들의 불평(25-30절), 셋째는 아버지의 최종 응답(31-32절)입니다. 각 부분은 독특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응답이라는 주제로 통일됩니다.
작은아들의 타락 – 하나님을 떠남의 본질 :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11절). 비유는 평범한 가정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내용은 전혀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2절).
‘재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비오스'(βίος)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물질적 재산만을 의미하지 않고, ‘생명’ 또는 ‘생계’를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8장 14절에서는 “생활의 염려”로, 21장 4절에서는 “생활비”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작은아들이 요구한 것은 단순히 돈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명, 아버지가 평생 일구어온 삶의 결실이었습니다. 이것을 아버지가 살아계신 동안 요구한다는 것은 아버지를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는 행위였습니다.
‘나눠 주었더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디에일렌'(διεῖλεν)으로, ‘분리하다’, ‘나누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27장 35절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장면에도 사용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의 비유적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떠나는 것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이 장면은 암시합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13절). ‘며칠이 안 되어’는 작은아들의 결심이 얼마나 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기 위해 한시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소토스'(ἀσώτως)로, ‘구원받지 못할 정도로’, ‘절제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에서 같은 어근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자기 파괴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합니다.
‘낭비하다’의 헬라어는 ‘디아스코르피조'(διασκορπίζω)입니다. 이 단어는 ‘흩어버리다’, ‘사방으로 흩뜨리다’는 의미로, 마태복음 25장 24-26절에서 달란트 비유에도 나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생명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흩어버렸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 즉 생명, 재능, 시간, 관계를 어떻게 낭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이미지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절). 여기서 우리는 죄의 결과를 봅니다. 작은아들은 모든 것을 다 쓴 후에야 자신의 상황을 깨닫습니다. ‘궁핍하다’의 헬라어 ‘휘스테레오'(ὑστερέω)는 ‘부족하다’, ‘결핍되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에서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인간의 궁극적 궁핍은 물질적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5절). ‘붙여 사니’의 헬라어 ‘에콜레테'(ἐκολλήθη)는 ‘붙잡히다’, ‘묶이다’는 의미의 수동태 형태입니다. 이것은 작은아들이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니라 종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6장 16절은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유를 찾아 아버지를 떠났지만, 결국 돼지 치는 종이 되었습니다.
돼지를 치는 일은 유대인에게 가장 굴욕적인 직업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 7-8절은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사야 65장 4절은 우상숭배자들을 묘사하며 “돼지 고기를 먹으며”라고 비난합니다. 작은아들이 돼지를 치게 된 것은 그가 영적으로 가장 낮은 곳까지 떨어졌음을 상징합니다.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절). ‘쥐엄 열매’는 헬라어로 ‘케라티온'(κεράτιον)인데, 캐롭 나무의 열매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나 동물의 사료로 사용되던 것이었습니다. 작은아들은 이제 돼지와 같은 음식을 먹고 싶어 하지만, 그조차 얻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죄가 인간을 얼마나 비참한 상태로 끌어내리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회심의 순간 – 자기 인식과 결단 :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 여기서 전환점이 찾아옵니다. ‘스스로 돌이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헤아우톤 엘톤'(εἰς ἑαυτὸν ἐλθών)으로,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회복한 것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먼저 자기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과 자신의 현재 상태를 대조합니다. 품꾼들조차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곳에서, 자신은 아들이면서도 주려 죽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역설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절). ‘일어나’의 헬라어 ‘아나스타스'(ἀναστάς)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결단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24장 7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할 때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작은아들의 일어남은 일종의 부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그의 고백은 두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하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지칭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천국’이 ‘하늘나라’로 표현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죄가 단순히 아버지 개인에게만 저지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죄임을 인식합니다. 시편 51편 4절에서 다윗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9절). 작은아들은 자신이 더 이상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들의 신분을 포기하고 품꾼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의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완전히 인정하며,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위치에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작은아들의 이해가 여전히 불완전함을 봅니다. 그는 자신이 품꾼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아직 아버지의 사랑의 깊이를 모릅니다. 그는 자신의 노동으로 용서를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의 행위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곧 그는 아버지의 사랑이 자신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사랑 – 무조건적 용서와 회복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절). 이 구절은 전체 비유의 절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들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며 먼 길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아버지는 매일 아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측은히 여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스플랑크니스테'(ἐσπλαγχνίσθη)입니다. 이 단어는 ‘스플랑크나'(σπλάγχνα), 즉 ‘내장’에서 파생된 동사로, 깊은 내적 감정을 의미합니다. 현대 번역으로는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로 표현되지만, 원래의 의미는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강렬한 감정입니다.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주로 예수님의 감정을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마태복음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마가복음 1장 41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누가복음 7장 13절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등에서 나타납니다.
‘달려가’의 헬라어 ‘드라몬'(δραμών)은 매우 강한 동사입니다. 당시 중동 문화에서 나이 든 남자가 달리는 것은 품위 없는 행동으로 여겨졌습니다. 달리려면 옷을 걷어 올려야 했고, 이것은 자신의 다리를 드러내는 것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든 체면을 버리고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자신을 낮추시는 것의 완벽한 그림입니다. 빌립보서 2장 7-8절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합니다.
‘목을 안고’는 헬라어로 ‘에페센 에피 톤 트라켈론'(ἐπέσεν ἐπὶ τὸν τράχηλον), 직역하면 ‘목 위에 떨어지다’입니다. 이것은 강렬한 포옹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33장 4절에서 야곱과 에서가 만났을 때,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그의 목을 안고 그와 입맞추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또한 창세기 45장 14절에서 요셉이 베냐민을 만났을 때도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포옹은 완전한 용서와 회복을 의미합니다.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21절). 작은아들은 준비했던 고백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완성되지 못합니다. 19절에서 그가 계획했던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그의 말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2절). 아버지는 아들의 고백을 끝까지 듣지 않습니다. 대신 즉시 회복의 조치를 취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상징적 행위가 나타납니다.
첫째, ‘제일 좋은 옷’입니다. 헬라어로 ‘스톨렌 텐 프로텐'(στολὴν τὴν πρώτην), 직역하면 ‘첫 번째 옷’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좋은 옷이 아니라 가장 명예로운 옷, 특별한 날을 위해 보관해둔 옷을 의미합니다. 스가랴 3장 3-5절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벗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죄의 제거와 의의 부여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61장 10절은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라고 노래합니다.
둘째, ‘가락지’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었습니다. 창세기 41장 42절에서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임명하며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더 3장 10절에서도 왕이 반지를 빼어 하만에게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가락지는 아들의 신분과 권위를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 ‘신’입니다. 당시에 신은 자유인의 표시였습니다. 종들은 맨발로 다녔지만, 자유인들은 신을 신었습니다. 신을 신긴다는 것은 작은아들이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며, 집안의 아들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3절). ‘살진 송아지’는 헬라어로 ‘톤 모스콘 톤 시튜톤'(τὸν μόσχον τὸν σιτευτόν)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날을 위해 따로 사육된 송아지를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는 염소나 양을 잡았지만, 송아지는 매우 특별한 경우에만 잡았습니다. 사무엘상 28장 24절에서 사울을 위해 “집에 살진 송아지”를 잡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가장 성대한 잔치를 의미합니다.
“이는 내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4절). 여기서 아버지는 아들의 귀환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상실에서 발견으로’ 해석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는 단순히 은유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하며, 5절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선포합니다. 작은아들은 영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3) 큰아들의 반응 : 율법주의의 위험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이르매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25절). 여기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듭니다. 큰아들의 등장은 비유를 처음 들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한 것입니다. 큰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성실함을 보여줍니다. 그는 책임감 있는 아들이었습니다.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26절). 큰아들은 직접 집에 들어가지 않고 종에게 묻습니다. 이미 여기서 그의 마음이 굳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집안의 기쁨에 참여하기를 주저합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27절). 종의 대답은 매우 정확합니다. ‘당신의 동생’, ‘당신의 아버지’, ‘건강한 그’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종은 모든 관계를 정확히 지적합니다. 그러나 곧 큰아들은 이 관계를 부인하게 됩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 권한대”(28절). ‘노하여’의 헬라어는 ‘오르기스테'(ὠργίσθη)로, 깊은 분노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 4장 26절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에서 같은 어근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큰아들의 분노는 정당하지 않은 분노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회복을 기뻐해야 할 상황에서 화를 냅니다.
큰아들은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거부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아버지는 놀라운 인내를 보입니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와 큰아들을 ‘권합니다’. ‘권한대’의 헬라어 ‘파레칼레이'(παρεκάλει)는 ‘위로하다’, ‘간청하다’, ‘격려하다’는 의미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강요하지 않고 설득합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큰아들의 고백은 그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첫째, 그는 ‘여러 해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충성스러운 아들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둘째, 그는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아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봅니다. 그는 아버지와의 관계를 거래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순종과 봉사에 대한 대가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받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율법주의자는 하나님께 순종을 빚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빚진 것처럼 생각합니다.
셋째, 그는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친구들과 즐기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아버지와의 교제를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 살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 큰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의 동생’이나 ‘내 동생’이 아니라 ‘이 아들’입니다. 그는 동생과의 관계를 부인합니다. 또한 그는 동생이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고 비난합니다. 이것은 본문에 나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단지 ‘방탕하여 재산을 낭비했다’고만 말합니다. 큰아들은 동생의 죄를 최악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아들의 진정한 문제를 봅니다. 그는 동생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동생이 받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더 많은 것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와 연결됩니다. 하루 종일 일한 품꾼들이 한 시간만 일한 품꾼들과 같은 품삯을 받고 불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의 최종 응답 – 은혜의 본질 :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절). 아버지의 대답은 큰아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대신 사랑으로 설득합니다. ‘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테크논'(τέκνον)으로, 친밀한 호칭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사용된 표현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두 가지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첫째,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큰아들은 아버지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항상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특권입니다. 둘째,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아버지의 모든 것이 이미 큰아들의 것입니다. 그는 무엇을 더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의 본질을 봅니다. 은혜는 우리가 벌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 하나님께 속한 것 자체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선포합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절).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이 네 동생’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그들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사용했던 표현을 반복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마땅하다’의 헬라어는 ‘에데이'(ἔδει)로, ‘필요하다’, ‘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24장 26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때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기뻐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입니다.
비유는 여기서 끝납니다. 큰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의도적입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큰아들처럼 밖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들어와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합니다.
4) 성경 전체의 주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는 탕자 비유
에스겔 34장 11-16절: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그 흩어진 양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탕자 비유의 아버지는 바로 이 하나님의 심정을 반영합니다.
이사야 55장 6-7절: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작은아들의 회심은 바로 이 초대에 대한 응답입니다.
예레미야 3장 12-13절: “너는 가서 이 말로 북방을 향하여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다만 네 죄악을 자복하라.” 이스라엘의 배역은 작은아들의 반역과 유사하며, 하나님의 초대는 아버지의 환영과 같습니다.
호세아 11장 1-4절: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이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탕자 비유의 아버지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아직도 거리가 먼데’ 맞이한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사랑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죽었다가 살아난’ 작은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영적 부활을 예표합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knowledge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의 고백은 작은아들이 자신의 재산을 배설물로 여기고 아버지께 돌아온 것과 유사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버지의 선제적 사랑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3. 잃어버린 시간의 회복
1) 개인적 차원 : 하나님께로의 귀환
우리는 모두 작은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지만, 그 생명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데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 재능, 관계, 기회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위해 소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영적 빈곤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수많은 ‘먼 나라’를 제시합니다. 성공, 부, 명예, 쾌락이라는 먼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자유와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처럼 우리는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상임을 발견합니다. 우리가 추구했던 것들은 우리의 영혼을 채우지 못합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첫 번째 단계는 ‘스스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생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립니다. 회심은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단계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인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작은아들은 돼지우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빠져있는 죄의 상황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죄와의 결별,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셋째 단계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죄를 분명히 인정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이 품꾼이 되기를 원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회복시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향해 달려오십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한다는 것은 과거를 되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낭비한 시간을 다시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십니다. 요엘 2장 25절은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메뚜기가 먹어버린 햇수를 회복시키십니다.
현대인들은 시간에 대해 깊은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을 느끼며, 우리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시간은 새로운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우리의 시간은 영원한 가치를 가집니다.
2) 관계적 차원 : 형제를 향한 사랑
큰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형제들과의 관계에서도 시간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일했지만, 사랑 안에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큰아들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고, 교회를 위해 충성스럽게 섬겨왔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특히 새로 온 신자들이나 회복되어 돌아온 신자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큰아들의 문제는 동생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그는 동생이 받는 은혜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비교와 경쟁의 심리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받는 것을 보면 불편해합니다. 특히 그 사람이 우리보다 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에 따라 주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는 정의상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6절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서로를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명령합니다.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것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원한과 분노 가운데 살아가는 시간은 낭비된 시간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은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모두 사랑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큰아들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사랑보다 자신의 권리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할 때,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로 흘러갑니다.
3) 공동체적 차원 : 교회의 사명
탕자 비유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을 찾고, 돌아온 자들을 환영하며,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벌어진 잔치는 교회의 축제적 성격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성장과 성공에 집중하면서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큰아들’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은 이미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성도들에게만 집중하며, 밖에 있는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새로 온 사람들, 특히 문제가 있는 사람들을 불편해합니다. 그들은 교회의 질서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이 비유를 통해 도전하셨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마태복음 9장 12-13절에서 예수님은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집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심판의 장소가 아니라 회복의 장소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절은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사람을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속화의 결과만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교회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율법주의적이고, 판단적이며, 배타적일 때, 사람들은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우리는 탕자 비유의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들을 간절히 기다리며, 그들이 돌아올 때 뛰어가 맞이하며, 그들을 완전히 회복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죄를 묻지 말고, 현재의 회심을 기뻐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큰아들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성도들이 은혜를 재발견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들이 자신들도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임을 기억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이 봉사의 의무감이 아니라 사랑의 기쁨으로 섬기도록 해야 합니다.
4. 은혜의 시간을 살아가기
1) 잃어버린 시간, 회복된 시간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기억을 통해 과거를 되살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근본적인 해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여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는 우리에게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줍니다. 우리가 낭비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십니다. 작은아들이 돼지우리에서 보낸 시간은 완전히 낭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러한 ‘돼지우리의 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던 시간, 죄 가운데 살던 시간,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지어 그 시간조차도 사용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약속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갔고, 노예로, 죄수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완전히 낭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시간을 사용하여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만드셨고, 그를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재해석하십니다. 우리가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이 성장의 기회였음을, 우리가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연단의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실 뿐 아니라, 그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2) 은혜의 시간 속에서 살아가기
이제 우리는 ‘은혜의 시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선포합니다. 매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의 시간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그것은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은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기도, 말씀 묵상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유지하는 수단입니다.
둘째,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아들은 쉼 없이 일했지만, 진정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의 행위가 흘러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은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환영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환영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35절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용서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넷째, 그것은 영원한 관점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사용할 때, 그 시간은 결코 낭비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권면합니다.
3) 구체적인 실천 : 오늘부터 시작하는 회복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 단계들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 자기 점검의 시간을 가지십시오. 작은아들이 ‘스스로 돌이켜’ 자신의 상태를 깨달은 것처럼, 우리도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나는 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정직하게 답해야 합니다.
둘째, 구체적인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작은아들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막연한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낭비한 시간, 소홀히 한 관계,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하나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결단을 하십시오. 작은아들이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처럼, 우리도 구체적인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끊어야 할 관계를 끊는 것일 수도 있고, 시작해야 할 일을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회개는 마음의 변화뿐 아니라 삶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넷째, 용서해야 할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큰아들이 동생을 용서하지 못해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오늘 한 사람, 아니 한 가지 일을 정하고 용서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다섯째, 잃어버린 자를 찾는 일에 동참하십시오.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이름을 정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매일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될 때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십시오.
여섯째, 매일의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에베소서 5장 15-16절은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하루를 계획할 때, 하나님께 드릴 시간을 먼저 정하십시오. 말씀 읽기, 기도, 예배, 섬김을 위한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일곱째, 감사의 생활을 하십시오.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귀환을 기뻐하며 잔치를 베푼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살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명령합니다.
4) 마지막 권면 : 아버지의 집으로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는 길을 배웠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지금이 바로 돌아갈 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작은아들처럼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와버려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저지른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금도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여러분을 보고 달려오실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큰아들처럼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기쁨을 잃어버린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충실하게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불만과 원망이 있을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받는 은혜를 보면서 불편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러분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깨닫고 기뻐할 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교회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바리새인들처럼 판단하고 정죄하는 목자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용서하는 목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잃어버린 자들이 돌아올 수 있는 집이 되도록 만드십시오. 여러분의 교회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곳이 되도록 하십시오.
시편 90편 12절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음을 인식하고, 그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사용할 때, 그것은 영원한 가치를 가집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2장 35절의 말씀으로 마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이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여전히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안으시고, 입맞추시며,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신을 신겨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잔치를 베푸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은혜 안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시간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아버지께로 돌아가십시오. 아버지의 집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다른 잃어버린 자들도 그 집으로 인도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길이며,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시간을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